계절은 바야흐로 봄이다. 삼라만상이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위에 이틀이 멀다하고 봄비가 소리 없이 뿌린다. 땅 속에서 이때다 기다리던 새싹들이 서로 앞 다투어 움을 내민다.
쏘옥쏘옥 연둣빛 잎눈이 얼굴을 뾰족이 내밀면 거기에 나도 질세라 꽃눈 또한 만만치 않다. 두 눈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꽃눈이 형이냐, 잎눈이 먼저냐 판단하기 어렵다.
동장군은 우수 경칩을 지나도 도무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엊그제 신문에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 연못에 투신했다가 얼어 죽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올해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변덕스러운 것 같다. 옛말에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같다가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계절의 윤회는 어김없는가 보다.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이렇게 읊은 셸리의 시구를 대자연 속에서 다시 만난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송곳 바람이 들어올세라 베란다 창문을 꼭꼭 잠갔었다. 그러하더니, 그새 창문을 반쯤 열어도 살갗에 실려 오는 바람결이 한결 훈훈한 느낌으로 다가든다. 
‘춘초는 년년록이요, 왕손은 귀불귀라.’
옛날 할아버지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즐겨 부르던 ‘왕유’의 시구가 생각난다. 할아버지 곁에 자면서 귀가 솔도록 듣던 노래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지금 철이 들어 풀이해 보니, 할아버지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그 말은, ‘해마다 봄이면 초목은 푸름을 더해 가지만 한 번 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월의 산야를 바라보노라면,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이고 싶어진다. 그리고 살아 있음이 눈물겹도록 행복함을 이 계절과 마주할 적마다 실감하곤 한다.
4월의 운문사 가는 길은 온 천지가 꽃밭이다. 솔숲 속에 숨어 피는 연분홍 진달래, 도로변에 온몸을 홀랑 드러낸 노란 개나리, 분홍빛 꽃 바다 복사꽃 물결, 환상적인 운문사 입구 왕벚꽃 터널! 하얀 배꽃, 은백색 자두꽃, 노랑. 군청색 팬지꽃, 이밥 같은 이팝나무, 조밥 같은 조팝나무, 한여름 뙤약볕에 호박꽃은 언제 필꼬?
5년 전, 청도 운문사 가는 길의 풍경을 노래해 본 글이다. 운문 댐 바로 밑에 위치한,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조그만 시골 학교에 책임자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대구에서 경산을 거쳐 통근하던 때가 그립다. 아침 출근길 대구를 벗어나면 경산에서 청도 사이 온 들판이 꽃밭이다. 복사꽃이 유난히도 많은 이곳은 환상적인 꽃 대궐 속을 지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청도읍 쪽으로 가면 높은 산 중턱까지 복숭아밭을 만들어 산 전체가 한 떨기 꽃송이 같다. 대구 부산 간 신고속도로 변에도 온 천지가 복사꽃 벌판이다. 청도 복숭아가 유명한 것도 고랭지에 재배하면 일교차가 심하여 당도가 높고 맛이 좋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사월의 산은 또 어떤가. 하루가 다르게 번지는 따스한 연둣빛 봄기운에 녹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푸름을 더해만 가고 있다. 온 산이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가운데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화신(花信)이 있다. 이름 하여 산 벚꽃! 산 중턱에 듬성듬성 마치 검은 머리에 흰 새치같이 피고 지는 꽃이다. 지금은 전국 어디를 가나 벚꽃을 만끽하고 있지만 한때는 일본 나라꽃이라고 배척하여 외면당했던 때도 있었다. 해마다 사월이 오면 온 산야에 희끗희끗 피어나 고대 지고 마는 산 벚꽃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 가운데서도 화려하게 뽐내는 참 벚꽃보다 수수하게 피었다가 사라지는 산 벚꽃에 더욱 정감이 간다.
우리나라 산야에서 봄을 알리는 꽃 소식은 뭐니 뭐니 해도 개나리와 진달래이다. 이 둘은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돋는다. 산 벚꽃이 남정네의 꽃이라면, 개나리와 진달래는 아낙네의 꽃이다. 노랑 저고리와 분홍치마를 연상케 할 만큼 정감을 주는 우리 꽃들이다. 난 가끔 진달래를 우리 나라꽃으로 바꾸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곤 한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과 꼭 닮은 정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줍어 수줍어서 다 못 타는 연분홍이
부끄러 부끄러워 바위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학생 시절 국어책에서 배운 진달래라는 시조 한 수를 나직이 읊조려 본다. 무언가 다정다감하고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진달래꽃은 전국 방방곡곡 어디서나 피고 지는 정겨운 꽃이기에 나는 좋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나면, 목련과 벚꽃이 다투어서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다. 이 두 꽃은 우아하고 화려는 하지만 금방 지고 마는 것이 단점이다. ‘K’ 작가의 수필집에 ‘빛깔 연한 꽃이 향기가 짙다’는 글이 있다. 그렇다. 빛깔이 짙고 화려한 꽃은 보기에는 좋지만 향기는 덜하다. 서양란은 꽃이 화려할진 몰라도 동양란에 비해 은은한 향기가 못하다. 난 화려한 벚꽃보다 수수한 진달래가 더 좋다.
 사월은 화신의 달이요, 낭만의 계절이다.
그 누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라일락 향기 그윽한 사월이 오면, 천방지축 산야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 연륜이 쌓일수록 자연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인간 본연의 순수함 때문이 아니겠는가. ‘전백연’이란 말이 생각난다. ‘전국백수연합회’를 줄여서 일컫는 말이란다. 난 작년에 퇴직하여 백수건달이 된 후 시간만 나면 동네 뒷산을 밥 먹듯이 오른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소중하고 곰살갑다. 특히 움이 트는 이 계절엔 더욱 더 그런 상념에 젖어 든다.
움들은 시간을 다투어 잎을 불려 꽃피우고 열매 맺어 종족을 번식시키고 싶은 모양이다. 이건 어쩌면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공통된 본능일 것이다. 겨우내 앙상하던 아카시아도 파릇파릇 하루가 다르게 움을 틔우기 시작한다. 계절의 여왕 오월이 오면 벌과 나비들을 유혹하겠지만, 더불어 자신도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리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될 테니까.
동네 뒷산엔 꽃들이 많이 피고 지지만 단연 내 마음을 사로잡는 건 산 복사꽃이다. 군데군데 듬성듬성 피어있는 산 복숭은 꽃이 유난히도 아름답다. 들판에 핀 복사꽃도 그렇지만 산 속에 숨어서 피고 지는 산 복사꽃은 더욱 우아하고 돋보인다. 화려하기야 홍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꽃눈과 잎눈이 조화를 이루면서 피기에, 홀랑 다 벗은 복사꽃보다 더욱 정감이 간다. 너무 튀지도 않고 고즈넉한 산 속에 홀로 핀 산 복사꽃이 그래서 난 더 좋다.
또 한 가지 예쁜 꽃은 모과꽃이다. 연분홍 꽃망울이 마치 새끼 동백꽃을 연상케 한다. 열매가 못생겼다고 모과라고 붙여진 이름에 비하면 그 꽃은 양귀비 같다. 우스갯소리로 과일을 여자에 비유한다면, 쉰 세대 여성은 모과에 견준다. 생긴 것도 울퉁불퉁 못생겼지만 과일도 아닌 것이 과일인 척하면서, 한번 맛본 사람은 시어서 다시는 먹기 싫어한단다.
4월 말경 산야에는 뭐니 뭐니 해도 화려하게 피는 꽃은 철쭉과 영산홍이다. 철쭉도 화려하긴 하지만 영산홍만 한 꽃이 또  있으랴. 요즘 공원이나 아파트 정원엔 철쭉과 영산홍이 만발하여 온통 꽃 대궐을 이루고 있다.
사월은 꽃과 낭만의 계절! 겨우내 움츠렸던 기지개를 활짝 펴고 생동감 넘치는 새봄을 맞이하여, 대자연을 마음껏 만끽 하리라.
저녁노을, 붉게 타는 영산홍을 바라보며, 즉흥적인 시 한 수를 읊조려 본다.
붉게 타다 못 다한 진홍빛이 꽃잎 속에 멍이 들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자취 없이 사라지는 황홀한 사월의 꽃이여!
나 그대 꽃빛에 취해 붉게 노을 지는 저녁 하늘을 훨훨 날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