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하다. 대체 이 일을 어쩐다지?
사무실의 선풍기를 껐는지 안 껐는지 아무래도 미심쩍다. 귀가하는 도중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집까지 거의 다 와서야 뒤미처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못 말리는 그놈의 건망증이 또 한 번 원망스럽다. 시곗바늘은 벌써 자정 어름을 가리키고 있다. 어림짐작으로도 왕복 육십 리가 족히 넘는 거리이니, 선걸음에 발길을 되돌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다. 애써 잠을 청해 보지만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 온다. 혹시 모터가 과열돼서 스파크라도 일어나면……, 그러면, 그러면 이웃들의 소동과 함께 119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한밤중의 정적을 깨뜨리고…….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래야 좋을까 저래야 좋을까. 귀찮더라도 가 보자. 가서 확인을 해 보자. 아니지, 설마 밤새 별일이야 있으려고. 아 아니야,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지. 계속 속 모르는 다툼으로 갈등하는 사이에 자꾸 시간만 흘러갔다.
아무리 해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결국 눈으로 확인을 시켜 주자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다. 주섬주섬 외출복을 챙겨 입고서 자는 아내를 깨웠다. ‘이 밤중에 무슨 청승이람.’ 아내는 땡감 한 입 베어 문 듯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러면서도 부스스한 얼굴로 따라나선다. 혼자 늦은 밤길을 보내기가 미덥지 아니한 모양이다.
평소 같으면 삼십 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두어 시간도 더 걸리는 듯 내처 조바심이 난다. 같은 물리적 거리일지라도 심리적 거리는 똑같을 수 없음을 이럴 때 절감한다. 가속페달을 내리누르는 오른발에 잔뜩 힘이 실려 있는데도, 어쩐지 차바퀴에 송진 가루라도 묻은 것 같이 도무지 속도감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부리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기계장치의 컨디션도 달라질 수 있는가 싶다. 차가 주차장에 닿기가 무섭게 사무실이 있는 5층까지 헐레벌떡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수사관이 들이닥치듯 왈칵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미간이 찡그려지면서 후유 한숨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선풍기는 전원이 꺼진 채 얌전히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진즉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안도감과 허탈감이 한순간에 교차하고, 맵짜지 못한 자신이 스스로 미워져서 잠시 표정이 일그러진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간사스러운 것인가 보다. 허겁지겁 애써 달려온 이상 차라리 켜져 있는 편이 훨씬 덜 허망할 노릇 아닌가. 아예 단념하고 그냥 넘기려 했을 때는 꺼져 있었으면 싶다가도, 확인을 하러 와서는 오히려 켜져 있기를 바라는 이 얄망궂은 심사는 또 무언가. 이러는 자신이 그저 한심스럽기도 하고 내심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돌려 생각도 해 본다. 만일 켜져 있는 상태였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하니 불이야 났겠는가마는―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지―, 그렇다곤 해도 아무도 없는 휑한 공간에 밤새껏 아까운 전력만 허비하게 되는 꼴이 아닌가.
해간 헛걸음은 했을망정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지 않고선 도무지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을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은 된 셈이다. 게다가 이를 기화로 오랜만에 아내와 심야의 드라이브 삼아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가외의 소득이기도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살아가다 보노라면 이런 난감한 일을 겪게 되는 경우가 누구에게든 한두 번씩은 있었으리라. 가스 불에다 빨랫감을 올려놓은 채 깜박 잊고 볼일을 보러 나섰다가 나중에야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돌아와 보니, 집 안이 온통 매캐한 연기와 고약한 냄새로 가득 차 있더라는 사연을 어느 지인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새롭다. 마음이야 왜 쓰리지 않았겠는가마는, 그나마 불이 나지 아니한 것만도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아이고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나오더란다.
일체가 유심소조唯心所造라고 했다.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세상 잡사가 모두 우리들 마음 가운데 달려 있다. 마음 한번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은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홀가분한 기분으로 돌아서 오는 길, 가속기의 페달에 가볍게 힘이 실린다. 살며시 아내의 손등에다 손을 얹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스테레오 음악이 감미롭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