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마 전 10여 년이 넘게 살던 집에서 이사를 했다. 글을 쓴답시고 책을 가까이 하다 보니 모인 책들이 제법 있었다.
하긴 귀중본이거나 희소가치가 있는 책은 별로 없고, 책에 관한 한 자칭 수집광이라 할 만큼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됐다. 특히나 셋 아이들이 쓰던 책 중 국어·역사책이라면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중 한 아이가 국문학과를 이수했으니 유용한 때가 있기도 했다.
당시 한국 현대문학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평론가 백철(白鐵)이 1960년에 쓴 ‘문학ABC’, ‘문학사상’ 등이 있었고 이후 모은 잡다한 책들이 비좁은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 책을 열었더니 그때 촉망 받던 소장학자 이어령(李御寧)이 한 서문에서, ‘오늘엔 시 한 줄보다 지폐 한 장을 더 아쉬워한다.’고 썼다. 당시도 그런 사조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우선, 그 책들은 문학 용어 ‘테마’ 정도나 겨우 알았던 내겐 정말 어려웠다. 그러나 역시 백 평론가가 쓴 문예사전을 들춰가며 주마간산 식으로 읽기는 했다. ‘앵그리 영맨’과 ‘비트 제너레이션’도 그때 접한 용어이다. 그땐 신문잡지 등의 유인물이 한글 병기도 아닌 한자전용 시대였으며 체제도 내리쓰기(縱書)였다. 당시 시사 잡지 ‘사상계’는 역사성이 있어 지금도 책장을 지키고 있으니 내 개인사를 말하고 있다. 여타 내겐 소중한 책들은 놔두고 눈물을 머금고 버릴 책들을 선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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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버려야 하다니!
너의 혼이 내게 들어와 내 눈을 뜨게 하고, 길을 가르쳐 주고, 내 오늘을 있게 했지. 가난한 내 영혼 널 찾아 살찌우고, 잠든 영혼 너로 해 일깨우고, 목마른 사슴 물을 찾듯 너를 찾아 갈증을 풀었다. 사노라면 간절히 필요한 것도 있고 절절한 염원도 있어 그걸 네가 가르쳐 줬을 땐 나는 무릎을 치고 길길이 뛰며 기뻐도 했다. 세상의 모든 고매한 진리가 너 안에 있는 것을 알았을 때의 즐거움이 그랬다.
  내 수족이요 분신이요 지식의 보고였는데, 나의 전부였는데 그런데, 그런 널 보내야 하게 됐다. 헤어져야 하는 너, 떠나가야 하는 너 차마 볼 수 없어 잡았던 손 놓고 돌아섰지. 그래도 못내 아쉬워 또 돌아서서 놓았던 손 다시 잡고 네 얼굴 만지고 쓰다듬고…. 그래도 난 널 보내야 하고 넌 가야만 했다. 참 매정스런 나였다.
까짓 피천 몇 푼에 널 보내야 했다. 을사오적신(乙巳五賊신)은 억만금을 받고 자신도 나라도 팔았지만 단돈 70원에 널 팔아야 했다. 그 앞에서 이성도 감성도 다 잃어버린 나, 길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혼이 깃든 널 몰라주다니…. 땅을 치고 가슴을 쳐야 하는 나였다. 넌 나를 무지하고 몽매하다고 탄식하고 원망했겠지. 아스라이 들리는 네 목소리를 뒤로 하고 비정하고 모멸차게 기어이 널 보낸 나는 정녕 사이비이거나 이중인격자가 되고 말았다. 좀팽이를 면할 수 없게 됐구나!
  발길 무거운 너 차마 볼 수 없어 외면도 해보고 잊으려고도 했다. 입양 보내는 엄마의 마음이야 천재일우 다시 만날 기약이라도 하지만, 푸줏간으로 가는지 비정한 쇠갈쿠리에 목이 매달려 가는지도 모를 너를 또 언제 다시 만날 기약이라도 하겠는가.
  네 팔자 기구해 평소에도 격식 차린 예우(번듯한 書架)도 한 번 받지 못하다가 임종에 다다라서도 포승줄에 묶이어 차디찬 마룻바닥에 처박히듯, 너를 가히 패대기를 치듯 했구나. 너 푸줏간이나 용광로 문전을 서성이게 될  때, 생사를 초탈해 와전(瓦全)보다 옥쇄(玉碎)하기로 체념하고 있을 때 혹시 박애의 독지가(篤志家) 눈에 띄어 구원의 손길이나 닿았으면 좋겠다고 행여 바라기도 했던, 참 뻔뻔스런 나였다. 내 널 소신(燒燼)의 문턱까지 몰아치기 해놓고 가까스로 환생을 바라기도 했다니 이 무슨 비뚤은 심사인지 나도 모르겠다.
  어쩌다 내게 불시착해 ‘서재’라는 호화 거처간이라도 있어 보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남들만큼이라도 사랑을 받았으면 이 가슴 이토록 아리지는 않았을 터인데,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될 너에게 이르노라. 내게 와 사랑 끝에 박대는 받았지만 소신하면 윤회(輪回)의 혜은(惠恩)으로 환생해 전생에 받지 못했던 사랑, 내세에는 사랑 받고 예우 받기를 기원하노라. 정말 사랑 받는 후생이 되길 빌고 또 비노라.
  생명이 경각인데 이제 와서 네 위상을 회복하고 칭송 받게 되라는 내 몰각, 몰이성, 이율배반을 용서하라. 마치 불효하고 용서를 비는 불효자이듯, 버릴 때는 언제이고 환생하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을 어찌해야 할꼬? 내 지은 망은지의(忘恩之義)를 정말 어찌 해야 하느냔 말이다.
  너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었다. 곧 혼이요 정신이요 ‘모든 것’일러니 그게 바로 나의 분신(分身)이었어라! 그랬는데, 그랬는데 너를 사지로 보내고도 몇 줄의 소회랍시고 끼적이고 보니 더욱 이 천박한 사고가 원망스럽구나…!
아! 나의 이 천박한 사고여-.    
아! 이 패덕(悖德)의 만행(蠻行)이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