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은 선이 굵은 생을 살다 떠난 인물들의 발자취로 가득한 보물창고다. 
사람살이가 어쩐지 시틋해지고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음의 공허가 가슴속에서 풍선처럼 차올라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역사의 무대에 엑스트라처럼 잠깐 등장했다 소리 없이 스러져 간 수다한 인물들의 삶의 자취를 더듬으며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한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의 그들 역시 오늘의 나처럼 인생 행로의 이런저런 고뇌와 번민으로 허우적거리며 한세상 머물다 갔을까.
역사란 각기 서로 다름의 측면에서 보면 어느 한순간도 똑같을 수는 없을 터이다. 하지만 큰 테두리 안에서 살피면 결국은 해와 달의 뜨고 짐이며 차고 이지러짐 같은, 간단없는 되풀이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 비단 역사책에 이름 석 자를 남기고 간 그런 인물들만이겠는가. 사람이란 어차피 한순간 한순간을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며 사는 유일무이한 동물인 것을. 그러기에 천하를 발밑에 부리던 고관대작이었든 이름 없이 생겨났다 자취도 없이 꺾인 민초民草였든, 모두가 똑같이 웃고 똑같이 울고 똑같이 번민하며 한세상 헤쳐 갔으리라. 
 줄기차게 이어지는 역사 가운데서 보면 한 인간에게 허여된 삶의 기간이란 지극히 미미한 것. 그것은 사과 껍질에 나 있는 바늘구멍만 한 반점보다 한층 하잘것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팔구십 천수를 누리고 원 없이 세상을 등졌건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한을 품은 채 불귀의 객이 되었건, 한량없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따지자면 그 생존의 차이는 숫자 영에 수렴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너와 나의 한살이가 끝나면 또 다른 삶이 대를 이어 계속되는 것이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해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었듯이”

거스를 수 없는 세대교체의 엄숙성을 어느 시인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한번 오면 언젠가는 반드시 가야 한다는 이 필연의 법칙. 나고 꺼지고 나고 꺼지고의 영원한 되풀이. 우리들 모두는 한동안 그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는 역사의 밧줄에 불안스레 매달려 있다, 어느 순간 시절 인연이 다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붙들고 있을 것 같았던 그 끈을 놓쳐 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가야만 하는 무상한 존재가 아닌가. 
어찌타 인간뿐이랴. 절대자로부터 목숨 부여받은 생명체들 가운데 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이법理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인 것을……. 이 점이 모두들 섭리 앞에 두려워 고개 숙이는 절박한 이유일 터이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로 해금 때로는 종교에 귀의하게 하고, 때로는 타자의 아픔에 관심 돌리게 이끌며, 또 어떤 경우에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몸부림치게도 만든다. 
“우리가 철학 한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비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설파한 철학자 키케로의 말도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으려는 존재자의 몸부림에서 나온 깨침의 소리가 아닐까.
세상의 하고많은 사람들의 삶은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유형으로 귀납될 수 있을 것 같다. 한평생 아예 부족함과는 인연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뜻한 바대로 모든 것 누리다 가는 득의得意의 부류가 그 하나요, 정명定命의 순간까지 한 번도 옳게 내 날이다시피 살지 못하고 끝내 한 많은 생을 접어야 하는 불우한 부류가 그 하나며, 때로는 격랑 치는 파도도 만나고 때로는 백합화 핀 향연에 초대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이란 수식어가 격에 어울릴 법한 곡절 많은 부류가 또 그 하나다. 
이 세 갈래 가운데서 어떠한 삶을 진정 값진 인생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화려함도 좋고 영예로움도 부럽지만, 그래도 나는 주저 없이 마지막 세 번째 부류에다 가장 후한 점수를 매기고 싶다. 우여곡절로 점철된 삶이, 설사 그 역정은 고단하긴 했을지언정 결과를 놓고 따져 보면 필시 성공한 인생일 터이다. 거듭되는 아픔이 그들을 한층 성숙한 인격체로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초년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충실한 증표證票가 될 수 있으리라.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표제를 단 어느 텔레비전 단막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굴곡 많은 세월을 파도타기 하듯 살아온 인물들이다. 그들의 한살이는 한편 처절하기도 하고 한편 감격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런 삶은 우리에게 때로는 잔잔한 감동으로, 때로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어느 누구라도 행복을 좋아하고 불행을 싫어하게끔 돼 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일 터이다. 하지만 불행만으로 엮어진 인생도 마땅히 그러하려니와, 행복만으로 설계된 인생도 어찌 보면 불구의 인생이기는 매한가지다. 역설적이게도, 불행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만 주어진다면 사람은 얼마큼 불행해질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그래야 그 마음 가운데 교만의 독버섯이 자라지 아니하므로. 
고통이며 아픔이 따르지 아니한 결실은 겉은 번지르르할지 모르지만 대개 알맹이 없는 빈 꼬투리일 때가 다반사이다. 한여름의 뙤약볕이 강렬할수록 가을의 열매 맺음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겨울 눈보라가 매서울수록 새봄의 보리는 초록 빛깔이 한층 선명해지는 법이다. 이것이 대자연의 이법이며 조물주의 섭리 아니던가. 
머물다 가는 자리가 어떠해야 할 것이냐의 대답은 이로써 어느 정도 구해진 것 같다. 머물다 가는 자리, 이 절대의 화두 앞에만 서면 나는 언제나 옷깃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 없이 순간을 살고 죽음으로 영원을 맞이하게 돼 있다. 
유유한 역사의 흐름, 그 간단없는 이행移行 가운데 조그만 물거품 한 점 일어났다 이내 꺼지고 마는 것 같은 우리네 인생살이. 늦가을의 저녁노을을 받으며 깊이 침묵하는 은빛 강물의 길고 느릿한 유영을 배우고 싶다. 그 천연스러운 모습을 닮고 싶다. 그리고 내 이 세상 머물다 가는 자리에 부끄러움의 얼룩이 남지 아니하도록, 부단히 올곧음 하나를 지향한 자의 이름으로 오래오래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