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의 농업사회 일 때의 5일장은 일반 민중과는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였다.
다원.다기화 된 오늘과는 달리 단순했지만 곡물가 등 생활에 필요한 인간사의 모든 정보를 시장에나 가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것은 집과 논밭 밖에 모르다가 이웃 동네 사람들과 만나서 풋풋한 인정이 오가는 소통의 마당이 됐으니까 말이다.
당시의 고령장에는 명물(?)도 있었다. 라이타돌 장수였다. 조그만 병, 아마도 페니실린 주사약 병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속에 빨간 라이타돌을 담고 줄 끝에 매달아 손으로 빙빙 돌리며 ‘라이타돌 릿타돌’을 외치면서 시장 골목을 누볐다.
행색으로만 보면 상투머리를 하고 백의민족의 상징인 흰 바지저고리에 긴 수염을 길렀으니 외양으로는 여느 사대부 못지 않았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6.25 전후 외래 문물이 민중 속을 파고들 때였으니 여인들은 머리 ‘빠마(퍼머넌트)’하고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그 라이타돌 장수, 이런 여인들만 보면 호통을 쳤다.
심하게는 ‘니 서방 잡아먹었느냐…’를 스스럼없이 내뱉었으니 여인들은 혼비백산을 했던 것은 물론이다.
여인들이 립스틱도 맘대로 바를 수 없던 시대도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 정도로 여기던 전통 유교사회에서 여인들의 집밖나들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른바 하류층 여인들이야 여기서 제외되지만 여인들의 나들이는 불문율로 엄금이었다.
그랬는데 시장까지 드나들었으니 그 ‘라이타돌 장수’와 같은 극단적 행태도 나타났던 것은 아닌가 한다.
이 땅에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들어와 유교질서에 길들여진 사회를 보고 여성교육을 시작했다.
이화학당을 세운 것이다. 처음 학생 모집에 나섰으나 이른바 양반가에서는 규수대신 식모나 하녀만 보냈던 사실로도 여성들이 오늘날과 같은 지위를 얻기까지는 숱한 곡절이 있었음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4.19 이후의 이야기. 영원한 철권이라 생각했던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4.19 혁명이야 말로 초교생으로 시작하여 온 국민이 봉기했던 순수한 구국의 정화(精華)였다. 여기서 이설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새로운 세상이 오게 된다고 모두들 기뻐했다.
시위 군중은 정권의 하수였던 경찰서를 습격.점령했다. 그 군중들은 ‘칭야칭칭나네…’라는 축제 무드로 이어가면서 읍내 번화가를 휩쓸었다. 즐겁고 신명나는 일이나 경사스런 일이 있으면 앞소리꾼이 선두에 서서 일단의 행렬을 리드하며 하나의 신명풀이를 할 때가 있었다. 유일한 다중의 ‘놀이문화’인 셈이었다. 4.19가 위대한 민권의 승리였으니 자연스레 자축마당으로 이어졌다. 때로는 걸쭉한 비속어의 입담이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하는데 그날 바로 “시아버지 불X까서 술 안주하세…”라는 앞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한창 신명놀음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말쑥하게 농군 복장을 한 어떤 사람이 그 행렬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좀 수상하여 당신 누구냐고 물었다. “나? 나는 한달 육장 매장 치는 고무신 중수올시다…” 했다고 한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가 바로 직전까지 경찰서를 지키던 서장이었다고 했으니 두고두고 즐거운 얘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경찰서 안전이 걱정되었던지 위장하고 직접 확인하러 나섰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전회에, 성곡 김성곤 선생이 남긴 큰 발자취에 비해 언급이 너무 소졸(疏拙)해 다시 예를 차리고자 한다. 한마디로 일세를 풍미했던 거목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음은 분명하리라.
모든 것이 열악했던 불모의 시대에서 일으킨 기업, 도 정치와 언론 그리고 교육까지의 업적을 보면 전천후라 해야 맞지 않을까 감히 피력해 보는 것이다.
당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젤 수염 하나만 보면 ‘위엄과 카리스마’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쩐지 소탈할 것만 같은 인상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정치의 속성이 그렇다곤 하지만 정치적 소신을 지키려다 정치 현장 전위(前衛)에서 물러난 과정은 아무래도 좀 의아해 할 뿐더러 대단히 아쉽기만 하다. 쌓아온 경륜과 덕망은 더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에 더 크게 기여할 분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