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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었다 녹더라도
곽 흥 렬 수필가 전)동리목월문예 창작대학 교수  |  webmaster@goryeo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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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2.23  18: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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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처럼 간수하기가 까다로운 식품도 드물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거두어들여 웬만큼 단단히 갈무리해 두지 않으면, 이듬해 봄에는 아예 먹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저 머나먼 남쪽 지방이 그의 고향인 탓일까, 열사의 나라에서 시집을 온 아낙처럼 고구마가 다른 작물에 비해 유달리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지 싶다. 겨울철이면 콧구멍만 하던 시골집 사랑방 윗목은 으레 고구마 자루들의 차지였다. 고구마는 일단 얼었다 싶으면 그냥 내다 버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겉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은 시커멓게 썩어 있기가 십상이다. 또 개중에 속까지 멀쩡해 보이는 것이 있어도, 삶거나 끓이면 쿰쿰한 냄새가 나면서 썰겅썰겅 씹히는 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고구마의 경우 냉동 보관은 절대 금물이다. 어쩌다 잘못 간수된 고구마를 그냥 버리기가 아까웠던지 아내가 김칫국에다 넣어 놓을라치면 아이들한테서 야단이 난다, 엄마는 도대체 이런 걸 음식이라고 내놓느냐며. 
어찌타 고구마뿐이랴. 사람살이의 이치 또한 이 고구마와 매일반인 것을……. 단순히 물이 얼었다가 녹으면 본래의 그 물과 성질이 같은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되, 사람의 마음은 한 번 토라졌다 하면 풀어진 뒤라도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앙금이 남기 때문이다. 
아내의 직장 동료 가운데, 남편의 못 말리는 바람기 탓에 가슴이 숯덩이가 돼 살아가는 한 아낙의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생김새며 학벌이며 돈벌이 등, 어느 모로 보나 그녀에 비해 형편없이 처지는 한 술집 여인과 몰래 내연의 관계를 맺어 왔던가 보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들통이 나는 바람에 한때 단란했던 가정이 파국 직전까지 휘청거린 모양이다. 남편이 손이야 발이야 빌며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두고 보라고 철석같이 다짐을 함으로써 일단 봉합이 됐다고 한다. 허나, 남녀관계에서의 다짐이란 것이 얼마나 미덥지 못한 약속인가.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두 번 세 번 그런 행실은 되풀이되었고, 죽네 사네 일대 활극을 벌여 삼이웃에 굿을 보이고는 급기야 막다른 상황으로까지 치달아 버렸다는 것이다. 임계수치를 넘어서도록 너무 세게 잡아당겨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반발력을 상실한 용수철처럼.
뒤늦게 남편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의 마음에 이미 회복하기 힘든 상처가 난 다음이었다. 육신의 멍이야 흐르는 세월 따라 시나브로 지워져 가지겠지만, 가슴의 멍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 일단 쳐 버리면 뽑은 뒤에도 영원히 자국이 남는 대못 자리처럼. 
사람의 심사란 게 참 묘해서, 한 번 밉기 시작하면 나중엔 꼴도 보기가 싫어지고 만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 떠나고 나면, 몸은 한집에 살아도 마음은 남남 사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마음이 천 리면 지척도 천 리요 마음이 지척이라면 천 리도 지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쥐꼬리만큼이라도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을 때 다툼도 있는 법, 애정의 재가 완전히 식어 버리면 다툼의 불씨도 사그라지고 만다. 
듣자하니 지금 그 집이 바로 그런 형편에 놓여 있는 모양이다. 그저 가면 가는가 보다 오면 오는가 보다, 소 닭 쳐다보듯 닭 소 쳐다보듯 서로 간에 관심의 끈이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어쩌다 슬그머니 애정 표현이라도 할라치면 그녀는 포근하고 달콤한 기분에 젖기는커녕 마치 뱀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처럼 오싹 소름부터 끼친다고 하니,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내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처음 신접살림을 차렸던 시절, 아내는 아버지의 완고한 성품 때문에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다. 삼십 년 가까이를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며 길들여져 온 아내로서는, 당연히 분갈이 한 화분처럼 우리 집 가풍에 적응을 하기가 녹록지 않았을 게다. 왜 출필곡 반필면을 하지 않느냐, 대체 옷차림이 그게 뭐냐, 제삿장을 어찌 이리 소홀히 봤느냐……, 아버지는 사사건건 아내의 처신을 못마땅해하셨고, 아내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일이 도저히 잊히지 않아 두고두고 가슴에 가시로 박혀 있다고 했다.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산 지 십 년도 넘어 되는 아내이지만, 딴에는 아버지한테 잘해 드린다고 하는데도 다분히 자식 된 의무감일 뿐 마음에서 우러나지 아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군말 없이 무던히 수발을 드는가 싶다가도 이따금 불쑥불쑥 지난 시절의 서운했던 감정을 들춰내곤 하는 아내다. 그런 그를 보면 가슴 한구석의 응어리는 끝끝내 풀리지 아니하는가 싶다. 이것이 아내로서는 심히 괴로운 일이겠다. 또 나는 나대로, 아내의 그 뒤얽힌 심사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딱히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해 답답할 노릇이다. 
누구든 상대의 마음이 얼기 전에 잘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얼고 나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녹더라도 먹을 수 없는 고구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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