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 진 뒤의 강변 풍경을 바라다본 적이 있으신가. 이런 장면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적지 않은 안복眼福이다. 
지금 나는, 낙동강 줄기 화원동산 서북쪽 절벽을 따라 나 있는 산책길을 거닐면서 큰물 진 뒤 펼쳐진 강변의 풍광에 취해 있다. 이것은 언제 어느 때건 쉽사리 맛볼 수 없는 축복의 시간이다. 
잠시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호흡을 고른다. 강물은 요 며칠 사이 줄기차게 내린 비로 잔뜩 불어나 둑 꼭두머리까지 차오른 채 넘실댄다.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릴 듯이 도도한 흐름이다. 
쉴 새 없이 용틀임하는 물너울에 무연히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마치 노을빛으로 물든 광활한 바다 정경을 바라다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누가 더 큰가 키 재기를 하던 강가의 미루나무들이, 몸통까지 죄 물속에 잠겨 겨우 목만 내놓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다. 둔덕 위에 선 나무들에선, 한동안의 가뭄으로 켜켜이 엉겨 붙어 있던 잎사귀의 흙먼지들이 빗물에 말끔히 씻겨 내려가 본래의 진초록 빛깔이 한결 선명하다.
우리 삶 가운데서 이런 광경을 만날 수 있는 날이 한 해에 며칠이나 될까. 일상사의 자질구레한 아귀다툼으로 꽉 막혀 있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 가슴속이 후련해 온다. 
아! 조물주의 힘이란 실로 위대하구나. 이렇게나 엄청난 물을 어디에 꼭꼭 숨겨 두었다가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일까. 늘상 마음속에만 간직하던 시퍼런 두려움과 공경심을 오늘 이 대자연의 조화 앞에서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 산골 물은 얼마나 시끄러운가. 큰 그릇일수록 목소리가 낮은 법, 귀청을 뚫을 듯이 왁자하던 산골 물도 흐르고 흘러 마침내 강심江心에 다다르면, 소리는 죽고 메아리 같은 여운만이 남는다. 장엄한 침묵의 세계 그대로다.
불현듯 일여덟 살 어린 시절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선연히 떠오른다, 어머니와 함께 거룻배에 몸을 맡긴 채 시원스럽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저쪽 강 건너의 외가 길을 오가던 때의 추억이. 
그 시절만 해도 밑바닥의 자잘한 모래 알갱이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만치 참 강물이 맑았었다. 잘 닦아 놓은 유리알 같았던 물빛, 양손으로 한 움큼 떠 그 자리에서 꿀꺽꿀꺽 들이켜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폭이 넓어서였을까. 찬찬히 살피지 않고서는 흐름을 거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물살은 느릴 대로 느렸다. 그 느릿한 걸음의 강물 속을 한가롭게 헤엄쳐 다니던 잉어며 피라미며 버들치며 그리고 다른 이름 모를 물고기 떼를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유심히 들여다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당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어머니의 할아버지께서는, 이즈음 같은 여름날이면 낚싯대를 둘러메고 강으로 나가 펄떡펄떡 뛰는 팔뚝만 한 잉어를 낚아 오길 즐겨하셨다고 했다. 그 동화 속 정경 같았던 말씀이 꼭 엊그제 일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강물이 아니던가. 그러던 것이, 이제 일상의 강은 더 이상 낭만을 노래 부를 만한 그런 멋스러운 공간이 못 된다. 분별없이 마구 먹고 마시고 토해 놓은, 헤아릴 수 없는 우리들 수다한 욕망의 찌꺼기들로 인해 그만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황폐한 강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잉크를 풀어놓은 듯, 온갖 생활하수며 공장의 기름때로 찌들어 버린 푸르죽죽한 물빛,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네 심성이 이 강물 빛 같지나 않을는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태풍에 동반된 폭우로 큰물이 한두 차례씩 쓸고 지나간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은 그나마 상황이 많이 나아진다. 
그리 길게 가진 아니할 것 같은 맑음의 회복 기간이지만, 어쨌든 한때나마 맑음이 있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 아닌가. 이것은 어쩌면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조건 없는 용서일 터이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할 일을 용서받아 놓고도 우리는 조금의 뉘우침도 없이 다시 또 예전의 그 잘못을 똑같이 되풀이해 버린다. 이것이 인간이다. 
왜 이리도 인간은 분별없이 어리석고 아둔한 존재인지 모르겠다. 
욕망의 끝에는 결국 허망함만이 남는다는 걸 불행하게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틀림없이 참담한 비극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다, 모르고 저지른 죄가 알고 저지른 죄보다 더 크다는 『밀린다왕문경』의 말씀에서처럼.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황톳빛 강물에 찬찬히 눈길을 보낸다. 자연이 지닌 절대의 성품에 비하면 인간의 알량한 재주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저 끝 간 데 모를 넉넉함, 저 서두르지 않는 여유로움, 강물은 이 순간 일상의 자질구레한 이해관계로 아귀다툼하며 한세상 부유하다 가는 옹졸한 우리를 더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자연은 인간이 자신을 내맡기고 우러러 받들어도 좋을 훌륭한 스승이다. 이 스승은 눈 밝은 사람 앞에 언뜻언뜻 우리의 한껏 높아진 콧대를 세 치만큼만 낮추고 살라는 무언의 가르침으로 다가오곤 한다. 
오늘 나는, 유유히 흘러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대자연의 가없는 너그러움과 웅숭깊은 겸허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