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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녀화
곽 흥 렬 수필가 / 동리목월문예 창작대학 교수  |  webmaster@goryeo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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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28  08: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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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산목련 나무에서 고대하고 고대하던 꽃이 피었다. 얼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순백의 빛깔에 눈이 부시다. 아니, 이 정도의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완전히 넋을 빼앗길 지경이라는 찬사가 오히려 적절한 대접일 성싶다. 전생에 무슨 공덕을 쌓았으면 이리도 고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 것일까. 비단 생김생김만이 아니다. 거기다가 주먹만큼씩 큼직큼직한 송이 송이에서 기막히게 달콤한 향기까지 뿜어내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린다.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향수도 산목련 나무의 향기에는 비길 바가 못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으로 누리는 즐거움에다 코까지 호사를 하니 행복감은 배가 된다.
다섯 해 전, 처음엔 겨우 한 뼘 남짓이나 될까 말까 한 세 그루가 우리 집으로 입양돼 왔다. 강원도 횡계의 깊디깊은 산골짜기에서 개울물 소리만 들으며 살다 낯설고 물선 새 환경에 적응하기가 녹록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그 가운데 두 아이는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몸살을 하더니 기어이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한 아이만이 어찌어찌 살아남아 오늘 이렇게 소담스러운 꽃을 선사해 준 것이다.
누가 볼세라 잎사귀 뒤에 살짝 얼굴을 가린 채 함초롬히 피어 있는 자태가 섣불리 범접할 수 없을 듯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녕 천사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니려나, 황홀한 상상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른 아침에 밥을 먹다가도 마당으로 뛰쳐나가 들여다보고, 야심한 밤에 잠을 청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안부를 살피곤 한다. 어느 정인이 이리도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윽한 눈길로 오래 바라다보노라니, 그 청초한 자태에 미혹돼 그만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 북한에서 국화國花로 지정해 떠받드는 꽃나무인 산목련, 생전의 김일성 주석이 이 나무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겼으면 나라꽃으로 삼으라고 영을 내렸을까. 백옥같이 희디흰 빛깔에서 비단 김일성 아니라 그 누구라도 한눈에 반해버릴 듯싶은 묘한 매력이 풍겨난다.
산목련은 글자 그대로 풀이를 했을 때 ‘산에서 자생하는 목련’이라는 뜻이 된다. 사람들은 목련하면 으레 백목련을 떠올리리라. 백목련이야말로 모든 목련류의 대명사처럼 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름에 ‘목련’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산목련을 두고서는 백목련의 사촌쯤이겠거니 여길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분히 오산이다. 백목련과 산목련은 서로가 닮은 듯 다른 구석이 무척 많은 두 종이다. 백목련이 잎보다 꽃이 먼저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봄 마중을 하는 꽃이라면, 산목련은 잎을 먼저 앞장세운 뒤 꽃이 그 뒤를 따라 가만히 얼굴을 내밀며 여름 마중을 하는 꽃이다. 백목련이 하늘 높이 횃불을 치켜들고 여항의 골목길을 밝히는 꽃이라면, 산목련은 다소곳이 등불을 켜들고 산사의 숲길을 밝히는 꽃이다. 백목련이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혼자서도 당당히 피어나는 꽃인 데 반해, 산목련은 혼자서는 외로워 여럿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피어나는 꽃이다. 육신이 여기저기로 팔려 다녀도 끝끝내 질긴 목숨 부지하는 백목련과는 달리, 산목련은 이곳저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놓으면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정절의 꽃이다. 백목련이 ‘이루지 못할 사랑’을 찾아서 한껏 멋을 부린 중국 여인 같다면, 산목련은 ‘수줍어 수줍어서’ 살포시 고개 숙인 조선 여인을 닮았다. 
여기까지가 다라면 조금은 싱거울 수도 있겠다 싶다. 두 꽃나무의 천성을 견줄 때 절대 빠뜨려서는 아니 되는 차이의 하나가 다름 아닌 화기花期다. 백목련이 일본의 벚꽃처럼 일시에 화르르 피어났다 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한꺼번에 후루루 쏟아져 버리는 점성 없는 나무인 데 비해, 산목련은 우리의 무궁화처럼 간단없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되풀이하는 끈기까지 지닌 나무이다. 그리해 달을 거지반 두 번 가까이나 채울 만큼 긴 기간에 걸쳐서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니, 이 또한 산목련 나무가 지닌 미덕중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산목련은 이름이 참 여러 가지인 꽃나무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하늘의 별 못잖게 많고 많은 수목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가운데 산목련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경우가 몇이나 될까. 송이의 크기가 함지박만 하다고 해서 ‘함박꽃나무’라는 명칭이 붙여졌는가 하면, 생긴 모습이 마치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나무에 피는 난초라는 뜻의 ‘목란木蘭’이라는 어여쁜 별명도 지녔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 비유해 ‘천녀화天女花’, 곧 천사의 꽃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천사처럼 우아하면서도 고고한 분위기가 풍겨나는 자태에서 그런 극찬이 하나도 지나치지 않다 싶다. 그런가 하면 한방에서는 ‘신이화辛夷花’로 불린다. 채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가 매운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비염과 축농증에 아주 잘 들을 뿐더러, 두통이며 치통, 생리통 같은 갖가지 통증에도 탁월한 약효를 발휘하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온 꽃나무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으리라.
이 수다한 명칭들 가운데서 딱히 하나만 고르라 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천녀화에다 낙점을 하고 싶다. 그지없이 고운 자태도 자태려니와, 무엇보다 더없이 순후해 보이는 성정이 어쩐지 천상의 여인을 빼닮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천녀화, 천녀화, 천녀화……, 알사탕을 굴리듯 입 안에 넣고 되풀이 궁굴려 본다. 불러도 불러도, 부르면 부를수록 정감이 가는 이름이다. 만일 내 이다음에 이승의 삶이 끝난 뒤 다시 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다면, 어느 깊디깊은 산골짜기에서 천녀화 곁을 지키고 선 한 그루의 소나무로 환생하고 싶다. 그리해 언제까지라도 한결같이 눈길을 주면서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얼마나 부지런히 공덕을 쌓으면 그런 바람 하나 이뤄질 수 있으려나. 산목련 나무, 아니 천녀화 앞에서 가져보는 분에 넘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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