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신문
뉴스기획취재
지역의 역사적인 인물사(4)근·현대의 인물
고령신문  |  webmaster@goryeong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6.15  10:09:3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일정 부문 왜곡(歪曲)되고 특정 문중에 경도돼 편집되었던 종래 고령지역의 인물사(人物史)를 재평가해 오직 객관적인 기준과 참고문헌(參考文獻)에 의해 고증된 인물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고령지역 인물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향토사의 귀감이 되는 고대부터 고려와 조선, 근·현대시대의 내용을 알리고자 한다.

■ 곽걸(郭杰)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회주(晦周)이고 호는 국전초부(菊田憔夫)이다. 구담(龜潭) 후근(厚根)과 정(禎)의 딸인 김해허씨(金海許氏) 사이에서 고종 5년(1868년) 쌍림면 월막리에서 태어났다. 당숙(堂叔) 영근(塋根)에게 출계(出系) 했다. 공은 어릴 때부터 선고께서 남려(南藜) 허유(許愈),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 하였던 관계로 유가의 가르침과 가학(家學)에 영향을 받아 고풍을 즐겼고 맑고 높은 명망(名望)이 있었으며, 가르침에 교화(敎化)돼 넓게 베풀었다. 공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義)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한 연서자 137명 중 123번째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했다. 경북 성주의 만세시위운동(萬歲示威運動)과 관련해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被逮) 되면서 발각돼 사건의 전모(全貌)가 드러나자 공도 이때 피체돼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끝내 병(病)을 얻어 1926년 6월 6일 향년 59세로 졸(卒) 했다. 묘는 쌍림면 월막리 국전촌(菊田村) 뒤편 술좌(戌座)에 있다. 1998년 8월 14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 했다. 2012년 6월 7일 애국지사(愛國志士) 곽걸 선생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후손들이 공의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 산소를 새 단장하고 추모비를 건립했다.
참고문헌-유림의 독립운동, 현풍곽씨 예곡공, 태허정 파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 김문배(金文培)
본관은 청도(淸道)이며, 자는 연석(然石)이다. 아버지 건정(健情)과 성재(成在)의 딸인 어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1926년 6월 18일 합천군 율곡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안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 농학대를 중퇴하고 귀국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임용시험에 응시해 합격 후 총독부에 근무했다. 해방 후 고령중학교 교사를 거쳐 고령교육청에서 근무했다. 그 후 가야대학교(伽倻大學校) 설립 추진위원장을 맡아 설립인가(設立認可)를 받았으며, 가야대학교 명예교수를 지냈다. 교육(敎育)에 관한 대통령(大統領)의 자문기구(諮問機構)의 성격을 지닌 문교부(文敎部) 교육정책심의회 전문위원과 경상북도 교육위원을 역임(歷任) 했으며,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로(功勞)로 훈장(勳章)을 받았다. 또한 고령군 체육회의 정관과 규약을 만들었으며, 고령군체육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1990년 최초로 고령군 지역사회발전 부문 자랑스런 군민상(郡民賞)을 수상했다. 2016년 2월 2일 향년 90세로 졸(卒)했다. 묘는 쌍림면 평지리 유좌(酉坐)에 있다.
참고문헌 - 최고·최초를 찾아라 고령기네스, 청도김씨 대동보

■ 정태희(鄭泰熙)
본관은 동래(東來)이다. 아버지 계원(啓元)과 이춘성(李春成)의 딸인 어머니 이건우(李建雨) 사이에서 덕곡면 반성리에서 1923년 5월 5일 태어났다. 1941년 4월 중국 산서성(山西省) 태곡(太谷)에서 광복군(光復軍) 화북지구(華北地區) 지하공작책(地下工作責)인 김천성(金天成)과 접선 돼 일본 경비대의 통역임을 이용, 적지구 노안(路安)에서 적국이동상황과 한국교포 초모공작 등을 위해 활동하다가 1943년 3월 중국인의 밀고로 김천성·이서룡과 함께 태원헌병대(太原憲兵隊)에 피체됐다. 1944년 12월 12일 중국 산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을(乙) 재3051부대 임시 군법회의에서 소위 항적방조(抗敵幇助)로 징역 5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西大門) 형무소로 이감 돼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해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 했다.
참고문헌-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 최경현(崔卿鉉)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학여(鶴汝)이다. 아버지 철곤(哲坤)과 두만(斗萬)의 딸인 월성최씨(月城崔氏) 사이에서 쌍림면 매촌리에서 1864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고향에서 거주하면서 대구·합천 등지에서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유독 쌍림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리해 1919년 3월 24일 오성렬(吳聖烈)의 집에서 서병직(徐丙稷)을 만나 날짜를 정해 군민궐기 대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3월 27일에는 이준이(李俊伊)의 집에서 최홍석(崔洪錫)에게 3월 28일에는 쌍림면 신촌리에 사는 전하성(全夏誠)에게 독립만세운동을 벌이자고 규합했다. 그러나 계획이 도중에 탄로돼 검거됨을써 쌍림면의 만세시위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그러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1년을 받게 돼 상고하였으나 5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돼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1월 27일 향년 64세로 졸(卒)했다. 묘는 거물산(巨物山) 자좌(子坐)에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 했다.
참고문헌-독립유공자 공훈록, 고령문화사대계1-역사편


/기획공동취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저작권자 © 고령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고령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기사
1
정미생고령군연합회 ‘창립 10주년 기념식 및 체육대회’ 개최
2
고령군 인구 30,428명… ‘발등에 불’
3
인구절벽, 이제는 갈 곳이 없다    
4
‘동고령일반산업단지’ 지역경제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 기여
5
고령시외버스정류장, 공공디자인으로 새옷입는다
신문사소개윤리강령편집규약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시장4길 6 (우)40137  |  대표전화 : 054)955-9111  |  팩스 : 054)955-9112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경북 다 1008  |  발행인 : 김명숙  |  편집인 : 김명숙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명숙
Copyright 2011 고령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o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