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국책방송 KBS가 ‘우리말 겨루기’에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얼마 안 가서 얼음이 어는 시절이 온다”는 말을 무엇이라 하는지 물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정답은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였다.
이상견빙지? 사자성어도 아니고 웬만큼 상용한자를 알아도 쉽게 접하지 못할 오언절구를 우리말 겨루기에 출제했으니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럴 때 뭐라 할까 궁금해진다. 한글 전용만으로는 어문생활을 원활히 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없고 고사성어 사전에서 찾은 이상견빙지다. 정부가 바뀌어 ‘적폐 청산’이라는 미명(美名)이 초교 한자교육에까지 손길이 뻗혔다. 초교 5~6학년 교과서에 300자 수준의 한자를 정책 연구와 의견 수렴을 거쳐 음과 뜻을 함께 표기할 수 있다는 ‘한자표기기준’을 발표한 것이 2016년 12월 30일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폐기한다고 한다. 기본한자 교육시키는 게 적폐인지 알 길이 없다.
‘한글 전용! 해야지, 한자 알고 전용해야지 모르고 하면 현대판 문맹…’이라고 전광진 교수는 설파한다. 나도 한글 전용은 안 된다고 몇 차례 기고한 적은 있지만 한자 교육 ‘폐지’를 보고 안타까워 또 적는다. 
언필칭 우리 국어는 한자말이 70%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꼭 그래서만이 아니라 원만한 어문생활을 하려면 필수로 기본 한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고교생의 한자 실력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자 교육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알게 한다. 애국가의 동해는 동쪽에 뜬 밝은 해, 백두산은 백 개의 산봉우리로 이뤄진 산, 삼천리는 자전거 상표라 대답한 학생이 있었다 한다. 또 다른 고교생은 고지식은 ‘지식이 높다’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대학생이 ‘교수님! 새해를 맞이해 명복을 빕니다’했다 한다. 웃을 일만은 아니다. 영어, 외래어 한 마디 틀리면 창피해 하지만 정작 정말 알아야 할 한자 모르는 것은 당연한 듯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일부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아직도 한자는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4차산업혁명 시대에 중고교생에게는 배워야 할 새로운 지식이 점점 늘어나는데 거기다 한자까지 배우게 한다면 그 중압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한자를 경시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거리의 간판도, 신문 기사의 표제어도 영어투성이다. 심지어 bluffing도 쓰지 않고 ‘블러핑(엄포)’이라고 쓴 기사도 봤다. 이러다간 얼마 안 가서 영어에 한글 병기할 시대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느 날 한 신문은 ‘스모킹 건, 워라벨, 대자뷰…’ 등을 쓰고, ‘글로벌 파트너 네트워크(신성장동력 확보와 해외 파트너사와의 미팅)’도 썼다. 또 남성복 디자인실에서 쓰는 용어 ‘뉴포티라면 클래식한 슈트를 캐주얼하게-’도 나왔다. 이런 시대이니 그래서 점점 한자 설 자리가 없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도 하게 했다. 한자도 엄연히 우리말인 것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뿐만이 아니다. IT, AI, VR 등 공인 이니셜 표기야 당연하지만 자기만 알고 쓴 표제어에 영어 ‘이니셜’을 쓴 것을 볼 땐 ‘이건 좀 심하다’이다. 겨우 알파벳 정도만 배운 나도 이나마 잡문이라도 쓰려면 영어공부도 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히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한자는 홀대를 받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 날의 신문은 코피 전략이라 해서 ‘코피’가 copy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목을 따지 않고 코피를 터뜨리는 수준의 공격’이라는 순우리말이었다. 외래어 홍수 시대이니 응당 외래어인줄 알기도 했다는 말이다.
사실 한자는 어렵다. 하지만 용례에 따라 다르게 읽는, 동음이의어 같은  상당한 고난도(高難度)의 한자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상식선의 어문생활을 하려면 최소한 300자 정도는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 상황이니 날마다 쏟아지는 신조어를 배워야 하는 것 그건 당연시하면서 한자에 대해서만은 은연 중 ‘거부감’을 갖는 것이 문제이다.
한자 얘기할 때마다 내 초교 시절이 생각난다. 미국 제일 높은 건축물이 103층인데 이름이 마천루(摩天樓)라 했다. 그땐 한자를 병기했으니까 선생님이 ‘어루만질 마, 하늘 천, 집 루’이니까 하늘을 어루만지는 집이라 설명했고, 얼마 전 평창올림픽 때 오랜만에 들어 본 마식령(馬息嶺)도 산이 높아 말도 쉬어가며 넘는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마천루나 마식령을 이렇게 한자를 병기해 주면 암기할 필요도 없이 쉽게 이해할 것인데….
획일적 암기교육보다 창의성 사고력을 길러줘야 한다는 오늘의 교육, 그러려면 70%나 되는 한자에서 파생된 어휘의 뜻을 아는 것이 먼저인데 그걸 모르면 암기할 수밖에 더 있는가. 얼마 전 신문은 ‘…한전이 급전 지시를 내렸다.’고 썼는데 한자 병기 없는 ‘급전’이 무슨 말일까. 그나마 나는 한문세대이니까 병기 없어도 꿰맞출 생각이라도 하지 기초한자도 배우지 않은 신세대들은 어떻게 이해할까?
교육정책뿐만이 아니다. 앞 정부의 모든 정책을 뒤집는 이 나라, 과연 어디로 갈 것인지 이 3등 시민도 좀 많이 걱정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