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의 마지막 날, 결혼한 지 삼십 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 엊그제인 듯싶은데 그사이에 하마 서른 해라는 세월이 흘렀나 보다. 시간이 쏜 화살 같다는 말이 참으로 실감이 난다.
어디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나흘 간 여행이라도 다녀올 계획을 세웠었다. 생의 큰 줄기를 넘으며, 지나간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고 다가올 인생 2막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맞이하자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일 년 중 가장 매서운 추위가 나들이를 고생스럽게 하는 시기인 탓에 따뜻한 봄날을 기약하며 집에서 보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나이가 드니 아내나 나나 무엇보다 추운 것이 싫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냥 맨송맨송하게 넘기려니 마음에 걸렸다. 별것 아닌 뭐라도 기념할 만한 일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결혼 삼십 주년을 자축하는 글귀를 새긴 케이크 하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아내에게 그동안의 노고에 위로를 건네는 짤막한 편지 한 통을 준비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을 담았다.

여보!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그새 어느덧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려. 당신의 오롯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가정의 행복이 있음을 생각하니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오. 앞으로 부디 건강 잘 챙기고 나날을 밝고 아름답게 가꾸어 갔으면 하오.
당신의 부족한 남편이

지난 서른 해 동안 아내의 일상은 오로지 가정을 건사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뿐이었다. 모든 관심의 촉수는 늘 가족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그 덕분에 남한테 크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만큼 든든하고 실한 집을 가꾸게 된 것 같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렇게 팔불출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기 직전, 나는 한 문학 단체에 입회했다. 거기서 수필가 K선생을 처음 만났다. 당시만 해도 그는 삼십대 후반, 나는 이십대 후반으로 둘 다 여름나무처럼 한창 싱싱하게 피어나던 청춘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K선생은 동화작가인 큰처남과 죽마고우이자 동기동창으로 형제지간처럼 지내고 있었다. 친구 사이와 처남매부 간 그리고 같은 단체의 소속원, 이 삼자 관계가 글을 매개로 하여 맺어진 특별한 인연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그래서이지 싶다. K선생과 나는 그 단체의 회원들 가운데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남달랐다. 그는 나를 많이 챙겼고 나는 그를 많이 의지했다.
그로부터 서른 해가 지나고 나니, 나는 내일모레면 이순을 맞는 중늙은이가 되었고 K선생은 고희를 넘기고서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었다. 후유, 한숨을 쉬면서 헤아려 본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다. 꼿꼿하던 어깨는 구부정해지고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패었다. 총명함을 잃으면서 판단력도 시나브로 무디어져 버렸다. 세월 무상이라는 말이 가슴에 절절히 와 닫는다.
그 때 갓 세상 구경을 나왔던 우리 집 큰아이가 벌써 내가 가정을 이루었을 당시의 나이만큼 나이를 먹었다. 앞으로 다시 그만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큰아이는 환갑을 맞게 될 것이고, 나는 만약 그 먼 후일까지 용케 살아남는다면 구순을 넘기게 될 것이다. 저 언덕 너머에 있을 것 같은 미지의 날을 떠올려 보노라니 무엇에라도 부딪힌 듯 아뜩해진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다. 시간은 모든 것을 거두어가 버리는 절대의 권능을 지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 소리 없이 그저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는.
오늘 아침, 삼십 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으면서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다짐에 다짐을 한다. 떠나간 지난 삼십 년 세월이 간단없는 회한의 연속이었다면, 이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은 보다 덜 후회스러울 하루하루를 엮어 가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