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 저의 소견은 그렇지 않습니다. 뭐 제가 군수론 같은 것은 전공하거나 조선시대의 관직 명칭을 연구해 본적은 없지마는 제가 군수를 해오면서 군수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평소에 조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그 수많은 관직의 명칭을 살펴보면 거의 예외없이 장(長:어른 장)자 아니면 관(官:벼슬 관)자가 들어있습니다. 장관(長官)은 워낙 높은 벼슬이라 두 글자가 몽땅 다 들어있고, 차관(次官), 국장(局長), 과장(課長), 계장(係長), 읍·면·동장(邑·面·洞長), 통장(統長), 반장(班長), 수사관(搜査官), 재판관(裁判官), 교장(敎長), 서장(署長) 등 심지어 계(契) 모임의 대표까지도 계장(契長)은 말 할 것도 없고 제사 지낼 때 잔을 드리는 제주(祭主)까지도 제관(祭官) 또는 헌관(獻官)이라 해 ‘장(長)’자나 ‘관(官)’자를 붙여 그야말로 관직이라는 관직은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 할 것 없이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벼슬 관’자가 아니면 ‘어른 장’자로 미장돼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조선왕조시대의 관직 명칭을 한번 훑어봅시다. 소위 삼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희롱하던 권력과 권위와 명예의 상징처럼 여겨왔던 ‘군수’라는 관직 명칭 그 어느곳에도 권위를 상징하는 ‘관’자나 ‘장’자가 없습니다. 일개 행정구역을 일컫던 ‘고을’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인 ‘고을 군’자와 ‘지키다’는 뜻의 ‘지킬 수’자 두 개로 만들어진 명칭이 군수라는 관직입니다. 군수를 순수 우리말로 일컫는다면 ‘고을지기’에 불과한 소박한 명칭입니다. 산지기, 문지기, 고지기, 옥지기, 등대지기 등 조선시대에 천직에 속했던 직책 명칭과 동렬에 자리매김한 것이 바로 군수라는 관직 명칭입니다. 우리의 옛 선인들의 판단의 지혜와 혜안이 섬광처럼 빛나지 않고서는 그 엄청난 존귀와 영광과 권세의 상징인 관직에 군수라는 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작명을 해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지금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정승(政丞)’으로부터 장관급에 해당하는 벼슬인 ‘판서(判書)’, 차관급에 해당하는 ‘참판(參判)’ 또는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觀察使)’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그 뜻이 소박하고 백성들에게 봉사하고 고뇌하며 바르게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의 명칭을 붙여주었을 뿐입니다.
군수보다도 한참 더 높은 ‘관찰사’ 역시 글자 그대로 ‘백성들을 잘 보살피라는 심부름 받는 사람’이라는 뜻 외에 무슨 권위나 권력, 명예를 뜻하는 글자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선인들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주어졌던 권력과 명예의 상징이 되었던 관직에는 예외없이 이렇듯 소박하고 초라하기까지 한 명칭을 붙여서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마땅히 백성을 하늘같이 알고, 내 몸같이 보살펴서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애민(愛民)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이도(吏道)를 구현하고자 했던 선인들의 깊디깊은 배려가 스며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의원님, 결론적으로 제 소견을 말씀드리면, 군수라는 관직의 명칭으로는 현재의 ‘군수’보다 더 좋은 명칭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나의 군수타령은 이렇게 끝이 났다. 회의장 내에는 여전히 깊은 침묵과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질문했던 국회의원으로부터 무슨 반론이 제기될 것인가? 아니면 젊은 군수의 신들린 듯 거침없는 궤변조(詭辯調)의 군수타령으로 자존심 상한 국회의원의 질타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지나 않을까? 깊은 침묵과 긴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초조와 불안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도청 간부들의 시선은 서로가 서로를 피했다. 그 누구로부터의 주시(注視)도 피해보자는 심산이었으리라….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배 모 의원 역시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얼굴 표정이 침통하게 굳어져 있었다. 넋 잃은 표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 그때 침묵을 깬 것은 위원장의 회의진행 목소리였다.
“다음 질문 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장 이곳 저곳에서 가벼운 기침소리며, 굳어있던 몸을 움직이느라 회의장 바다에 의자다리 부딪치는 소리로 잠시 부산해졌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의가 진행돼 그날 행사는 무사히 끝이 났다.
회의장 밖을 나가면서 내 어깨를 치는 이상직 내무국장의 얼굴에는 함박꽃같은 웃음이 가득했다. 다른 모든 간부들도 이구동성으로 “군수님 정말 멋진 답변을 했습니다”를 연발했고, 모두가 개선장군이나 된 듯한 만족한 표정들이었다. 복도에서 만난 김중권 의원(내가 청송군수로 재직할 때 지역구 의원이었음)께서는 내 손을 잡고 “박 군수, 정말 명답을 했소. 역시 박 군수야”하면서 경탄스런 찬사를 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군청으로 출근하는 차 안에서 MBC <달구벌 만평>이 넉살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군수 명칭을 민주시대에 맞게 바꿀 용의가 없느냐는 모 국회의원의 질문에 박○○군수, 군수라는 명칭은 ‘고을지기’에 불과한 소박한 민주적인 명칭이라 바꿀 필요가 없다고 답변을 했지 뭡니까? 우문현답에 질문한 국회의원만 왕창 망신을 당했지 뭡니까요.”
그 후 10년. 성주군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내무부와 미국유학, 그리고 제주도를 거쳐 다시 경북도청 기획관리실장으로 부임했을 때, 10년 전 당시 과장으로 있었던 김덕배 국장이 내 손을 잡고 얼마나 반갑게 맞이하시던지.
“실장님, 옛날 군수 명칭 풀이하시던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때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평소에 얼마나 군수 공부를 했으면 순식간에 그렇게도 청산유수로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까?”
이제 모두 지나간 옛 이야기의 한 토막이 돼버렸다. 그날 역사가 펼쳐졌던 무대의 주인공들도 다 공직을 떠나고. 몇 분은 유명을 달리하고. 다 부질없는 일인가. 고을살이하고 남은 빛바랜 추억을 되새기며 오늘도 속으로 넋두리처럼 ‘군수타령’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