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생활 30년 문턱에서 뭉중한을 틈타 군수타령이나 한번 해볼까 하는데. 그러니까 지금부터 십사오년 전쯤 내가 초임청송군수를 거쳐 성주군수로 있을 때 이야기다.
어느 날 경북도청으로부터 국회 농수산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의 도청순방이 있으니 업무보고에 도청 인근 시장·군수들도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도지사는 이상희 전 내무부장관(경북지사 직전에 대구직할시장을 역임했음)이었다. 도지사가 직접 농수산위 국회의원들에게 도정업무보고를 마쳤을 때 보고장 내에는 국회의원들로부터 무슨 까다로운 질문이나 고성질책이 터져 나오지나 않을까 상당히 긴장된 분위기 속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순간 도지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배 모 의원(그 당시 집권 여당의 정책실장인가 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이 뚱딴지 같은 질문을 했다.
“지사, 과거 왕조시대의 권위의 상징이자 악덕관료의 상징인 군수(郡守)라는 관직 명칭을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이제 민주시대에 걸맞게 다른 이름으로 개칭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지사의 의견은 어떤가요? 예를 들면 과거 시·군의 ‘교육감(敎育監)’으로 바꾸었는데 군수도 ‘군장(君長)’이라던가 또는 다른 어떤 민주적인 명칭으로 개칭해야 된다고 본 의원은 생각되는데요.”
질문이 끝나자 보고장 내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더욱 고조되었고, 싸늘한 냉기류 속에 서로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는 도청 간부들의 얼굴에는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가을 감추지 못하고 누군가 십자가를 멘 구세주가 나와 주기를 긴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지사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날의 보고와 국회의원들의 방문 목적과는 거리가 먼 예기치 않던 질문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때만해도 서슬퍼런 무소불위의 내무부가 중앙에 버티고 있을 때인데, 만약 내무부의 의도와 다른 답변(당시 내무부에서 군수 명칭을 바꿀 의향이 없었음)을 했다가는 도지사라 할지라도 무척 난처한 국면에 빠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국회의원나리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호통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수간 제일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하던 사람은 도의 이상직 내무국장(작고했음)이었다. 직챙상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그의 초조해하는 시선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도청 간부들과 시장·군수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나에게로 모아졌다. 난처해하고 있던 도지사의 시선도 예외없이 나에게로 돌려졌다.
“현직 군수가 답변하는 것이 좋겠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내무국장의 다급하고 절박한 애원조의 청은 차라리 채근에 가까웠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운수소관이었던지, 하루 일진이 나빴던지 해가 그날 나는 졸지에 준비되지 않은 십자가를 메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변명을 해볼 촌각의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모든 참석자들은 위기를 모면했다는 안되의 표정과 함께 회의장 정면으로 시선을 원위치 시켰다.
질문을 했던 배 모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제21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계셨던 김중권 의원도 있었음)의 시선은 나를 주목하게 됐고, 도지사는 그 특유의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다소 불안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엿볼수 있었다. 내가 도지사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이 어린 군수가 도대체 어떤 답변을 할 것인가? 뚱딴지 같은 질문에 뚱딴지 같은 답변을 해서 분위기를 더욱 난처한 국면으로 빠뜨리지나 않을까하는 그런 불안감이었으리라.
나는 잠시 정색을 하고 나서 신들린 듯 답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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