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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림(韓國儒林)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 고령출신 서명자 현창(顯彰) #5독립운동가 윤양식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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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8  14:5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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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식(尹亮植)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옥여(玉汝) 또는 태봉(泰奉)이다. 아버지 태규(泰奎)와 수극(壽極)의 따님인 창원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고종 3년(1866년) 고령군 성산면 용소동(龍沼洞)에서 태어났다.
공은 젊었을 때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과거를 보는 데 필요한 학업을 폐지하고 궁벽(窮僻)한 시골에 은거(隱居)해 재주나 학식 따위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감추었으며 스스로 늬우치고 경계했다.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등 137명이 참여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던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擧事)에 분연(憤然)히 동참해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한국유림송파리평화회서(韓國儒林送巴里平和會書)’에 124번째로 서명해 조국독립(祖國獨立)의 당위성(當爲性)을 세계만방(世界萬邦)에 알리는데 적극 가담했다.
1919년 4월 12일 경북 성주의 만세시위운동(萬歲示威運動)과 관련해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被逮)되면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 발각돼 사건의 전모(全貌)가 드러나자 공도 이때 피체(被逮)돼 모진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1919년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궐석(闕席)한 채 징역 6월을 판결(判決)을 받았다. 1919년 8월 2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중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피고 두 사람은 유생(儒生)인데 대정 8년(1919년) 3월 초순 이름 있는 선비 곽종석(郭鍾錫) 및 장석영(張錫英),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에서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 중인 만국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에 관한 연명(連名)의 청원서를 제출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계획한 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을 권유해 가맹(加盟)시킬 무렵 각 위에 적힌 거주지 마을에서 김창숙 등이 가지고 온 취지의 청원서에 유생으로서 서명하거나 또는 대서(代書)할 것을 부탁했다.
또한 김창숙을 그대표자로 해 동인으로 해금 이 청원서를 가지고 동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파리를 향해 출발하게 함과 동시에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을 다수 작성해 조선 내 가 지방의조선인에게 배포함으로써 공공의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이하 생략”. 옥고(獄苦)를 치룬 뒤에도 자나 깨나 조국의 광복(光復)을 위해 초사(焦思)하다가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12월 30일 애석하게도 수(壽) 78세로 기세(棄世)했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창리(倉里) 뒤 저전산(楮田山) 임원(壬原)에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했다. 배위는 찬동(贊東)의 따님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유림의 독립운동, 독립유공자(공훈록), 파평윤씨 태위공파 세보(을축보)


전회에서 한국유림(韓國儒林)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 고령출신 서명자외에 제한된 지면관계로 추가로 곽걸(郭杰), 박재근(朴在根) 애국지사(愛國志士)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 곽걸(郭杰)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회주(晦周)이고 호는 국전초부(菊田樵夫)이다. 구담(龜潭) 후근(厚根)과 정(禎)의 따님인 김해허씨(金海許氏) 사이에서 고종 5년(1868년)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에서 태어났다. 당숙(堂叔) 영근(塋根)에게 출계(出系)했다. 공은 어릴 때부터 선고께서 남려(南黎) 허유(許愈),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였던 관계로 유가(儒家)의 가르침과 가학(家學)에 영향을 받아 고풍(古風)을 즐겼고 맑고 높은 명망(名望)이 있었으며 가르침에 교화(敎化) 돼 넓게 베풀었다.
공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한 연서자(聯署者) 137명 중 123번째로 서명하는 등 항일 운동(抗日運動)을 전개했다. 경북 성주의 만세시위운동(萬歲示威運動)과 관련해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被逮)되면서 발각돼 사건의 전모(全貌)가 드러나자 공도 이때 피체(被逮)돼 모진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끝내 병(病)을 얻어 1926년 6월 6일 향년 59세로 기세(棄世)했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국전촌(菊田村) 뒤편 술좌(戌坐)에 있다. 1998년 8월 14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했다.
2012년 6월 7일 ‘애국지사(愛國志士) 곽걸(郭杰) 선생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후손들이 공의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 산소를 새 단장하고 추모비(追慕碑) 건립했다. 배위는 기원(基源)의 따님인 서산유씨(瑞山柳氏)로 합폄(合窆)이다.

※참고문헌 : 유림의 독립운동, 현풍곽씨 예곡공, 태허정 파보(임술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 박재근(朴在根)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진근(瑨根)으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자는 영언(韺彦)이고 호는 운석당(雲石堂)이다. 유학(幼學) 종항(宗恒)과 석관(錫寬)의 따님인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고종 7년(1870년) 1월 6일 태어났다. 일찍이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문하에서 수업한 후 온능참봉(溫陵參奉)에 제수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21번지 소재 조선 제11대 중종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신씨(愼氏)의 능(陵)을 관리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이하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등과 대한독립(大韓獨立)을 모의(謀議)하였으며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당시 유림에서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것을 통분하고 한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요지의 장서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에 1919년 경남 거창(居昌)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星州)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洪城)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돼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해(上海)로 갔다. 이때 박재근은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그후 달성군 현풍면에서 영업중이던 약국의 문을 닫고 조랑말을 타고 고령, 성주, 서울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했다. 1955년 5월 26일 향년 85세로 기세(棄世)했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촌 뒤편 선고(先考) 좌편(左便)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했다. 행로난(行路亂) 등 한시집(漢詩集), 각종 의서(醫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문, 대구 한시(漢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壯元)한 한시 등 20여점이 유고(遺稿)로 전한다. 초취(初娶)는 헌규(憲珪)의 따님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이고 재취(再娶)는 재운(在運)의 따님인 진주하씨(晋州河氏)이다.

※참고문헌 : 국역유림단독립운동실기(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 독립유공자(공훈록), 밀성박씨 충간공파 세보(을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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