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요, 어젯밤에 이 차가운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고 얼마나 추위에 떠셨지요?”
  할아버지의 묘소에 벌초를 하던 날 질척질척 내리는 늦가을비가 등허리를 싸늘하게 적실 때, 나는 당신께서 비바람 몰아치는 외진 곳에서 겪으셨을 고초를 와락 가슴에 안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얽힌 끈끈한 정은 여느 조손관계보다도 좀 유별한 점이 있다.
벌써 삼십 년 전쯤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궁벽한 시골 촌뜨기로 자라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로 진급하면서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당시 시골서 공부를 하면 도시의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길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어머니가 아들의 전학을 닦달하였고, 아버지도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어린 나를 도회지 중학교로 전학시키게 되었었다.
전학은 어찌어찌 이뤄졌다. 한데 막상 전학이 되고 보니 가난한 시골 살림에 하숙을 시킬 여유가 없었던 형편으로 해 부모님은 노심초사했다. 그런 걱정을 지켜보는 할아버지인들 마음이 편하진 못하셨으리라.
보통의 경우라면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손자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우리 집은 사정이 그와 정반대였다.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는지 결국 할아버지가 손자 뒷바라지를 자청하고 나서셨던 것이다.
고희를 넘긴 연세에 걸맞지 않게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침밥을 짓고 손자가 학교 간 후면 빨래하기며 시장 보기며 그리고 반찬 장만에다 방청소까지, 젊은 주부가 해내기도 힘에 부친 생활을 당신께서는 한마디 불평 없이 해내셨다. 어쩌다 아침밥이 늦어져 손자가 끼니를 거르고 학교에 가게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따뜻한 도시락을 준비해 학교에까지 찾아오곤 하셨다. 이런 힘겨운 생활이 꼬박 삼 년을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당시 어찌 그리도 철이 없었던 것일까. 사춘기여서 그랬는지 그런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에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밥이 늦느니, 이불이 더럽다느니 하면서 갖은 투정을 부려 당신의 마음 가득히 눈물이 고이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손자의 지나친 성화에 못 이겨 당신께서 말없이 집을 나가 버리신 일도 있었다.
어쩌다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빛바랜 사진첩을 펼쳐 놓고 생전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때 지각없이 보채어 당신의 마음속에 눈물 고이게 했던 지난날의 그 숱한 행실들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이 이제는 도리어 내 가슴속 깊숙이 고이곤 한다.
  “오늘 당신의 묘소에 내리고 있는 이 싸늘한 가을비를 저 혼자 온전히 받을 수 있다면, 그리해 당신께서 좀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잠드실 수 있다면 이것이 이 불초한 손자가 당신에게 갚을 수 있는 그 헌신적인 은혜에 대한 한 가닥 참회가 될 줄 알겠습니다.”
  이렇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러고는 묘소 주변에 돋아난 아카시 뿌리를 뽑고 잡풀들을 깨끗이 쳐냈다. 햇볕이 잘 들도록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들도 말끔히 치웠다. 당신께서 맞으셔야 할 비를 어제까지든지 내가 대신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그 빗줄기가 하나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겨우내 내려 당신을 얼어 떨게 할 모진 눈보라까지도 오늘 죄다 내 육신에 쏟아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지난날 내가 할아버지에게 지었던 그 죗값으로 흘리는 참회의 눈물이 빗줄기 돼 당신 묘소에 내릴 때 그 비는 오래도록 훈훈함만을 간직해 묘소를 덥혀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생각에 젖어들자 비로소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죄가 사해지는 느낌이었다. 순간, 그것이 당신의 음덕蔭德 때문이라고 느껴지면서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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