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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림(韓國儒林)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 고령출신 서명자 현창(顯彰) #11회 : 독립운동가 곽수빈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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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13  10: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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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유림(韓國儒林)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
(1) 의의(意義)
1919년 3월 1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세 종교단체가 합동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을 전개하자 유림단(儒林團) 측에서도 별도로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강회회의(巴里講和會議)에 137명의 유림 대표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전문 2천 674자에 달하는 장문(長文)의 서한(書翰)을 보냈는데 이것을 소위 ‘유림(儒林)의 파리장서(巴里長書)’ 혹은 줄여서 ‘파리장서(巴里長書)’라 한다.

(2) 3·1운동(三一運動)과 차이점
3·1운동(三一運動)은 국민봉기(國民蜂起)로써 대내투쟁(對內鬪爭)을 제1차적인 목적으로 하는 반면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은 유림(儒林)의 총의(總意)를 비밀리에 망라(網羅)하고 그것으로써 국제무대(國際舞臺)에서 공개적(公開的)으로 투쟁(鬪爭)하려는데 그 차이점이 있다.
(3) 고령출신 서명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한국유림송파리평화회의서(韓國儒林宋巴里平和會書)에 서명한 연서인(聯書人) 137명 중 고령출신 서명자는 서명순서로 나열하면곽수빈(郭守斌), 이인광(李寅光), 이상의(李相義), 이병회(李柄回), 윤양식(尹亮植), 곽걸(郭杰) 등 6명으로 파악된다.
군세(郡勢)에 비추어 보면 6명의 애국지사(愛國志士)가 배출된 것은 우리 고장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당시 왜인(倭人)들의 총검(銃劍)앞에 우리의 생명이 초개시(草芥視)되던 때에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서명에 흔쾌히 동참(同參)했던 지역의 애국지사(愛國志士)의 행적을 서명순으로 현창(顯彰)하여 후세에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한다.

2. 독립운동가 곽수빈(郭守斌)의 활약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사언(士彦)이고 호는 몽와(夢窩)이다. 아버지 치송(致崧)과 남수(南秀)의 따님인 어머니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고종 19년(1882년) 임오년 고령군 임천면 월막동 109번지에서 태어났으나 숙부 치안(致安)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공의 집안은 예곡(禮谷) 곽율          이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초계군수(草溪郡守)로 부임하여 의병장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과 함께 낙동강 오른편으로 현재 지리산 인근지역을 포함한 강우지역(江右地域)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8대조 매헌(梅軒) 수강(壽岡)은 학덕(學德)이 출중(出衆)하므로 사림(士林)들이 추중(推重)하여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세워 향사(享祀)하는 등 진충보국(盡忠報國)과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遺風)을 지키면서 400여년간 살아온 명망(名望)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다.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생장(生長)한 그는 을사조약(乙巳條約)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인한 망국(亡國)의 설움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면서 구국방략(救國方略)을 궁구(窮究)하던 중 스승인 임제(臨齊) 서찬규(徐贊奎)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受學)하였던 서건수(徐建洙)와 함께 파리장서(巴里長書) 137명의 서명자중 21번째로 서명하여 조국독립(祖國獨立)의 당위성(當爲性)을 세계만방(世界萬邦)에 알리는데 적극 가담하였다. 지역인사 중 최초로 서명하여 지역 유림 5명의 서명(署名)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년 4월경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모진 옥고(獄苦)를 겪었으나 1919년 6월 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에 의하여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그 후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고령향교의 직원(直員 : 현재 전교)을 맡아 향풍교화(鄕風敎化)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하는데 진췌(盡悴)하였다.
1942년 압록강 상류 북쪽 조선인 거주 지역인 서간도(西間島)로 망명(亡命)하여 2년동안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다가 수토병(水土病)으로 귀국(貴國)하여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중심으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광복(光復)을 맞이하여 좌우대립의 혼란기에도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금도(襟度)를 지켰다. 정남택(鄭南澤), 곽태진(郭泰珍) 등 지역 정객(政客)들의 자문(諮問)에 응하고 탁견(卓見)을 제시하였으며 ‘강세계(講世契)’를 만들어 혼란기(混亂期)의 도덕(道德)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전원생활(田園生活)을 누리다가 1951년 신묘년(辛卯年) 2월 24일 향년 69세로 기세(棄世)하셨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구리곡 간좌(艮坐)이다,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6년 8월 15일 건국포장(建國襃章)이 추서(追敍)하였다. 2005년 9월 24일 애국지사(愛國志士) 몽와(夢窩) 곽선생(郭先生) 추모비(追慕碑) 건립위원회(建立委員會)에서는 고귀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길이 후세에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추모비(追慕碑)를 세웠으며 비문(碑文)은 문학박사 조동걸(趙東杰)이 근찬(謹撰)하고 진성후인(眞城後人) 이원흡(李源潝)이 근서(謹書)하였다. 배위는 영산신씨(靈山辛氏) 기식(基植)의 따님이다.

   
 

※참고문헌 : 애국지사 몽와 곽선생 추모비문, 독립유공자 공훈록, 고령군지(1996년), 현풍곽씨 예곡공, 태허정 파보(임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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