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해질역> 공연을 알리는 안내문이 전자우편으로 날아들었다. 실로 얼마 만에 들어보는 연극 공연 소식인지 모르겠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연극’이라는 낱말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그 정겨운 낭보가 불현듯 극장으로 달려가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해질역’, 해가 질 무렵의 시간을 나타내는 ‘해질녘’과 기차가 잠시 멈추어 섰다 떠나는 곳인 ‘역’을 합성해 만든 어느 가상의 간이역 이름일 터이다.
제목만으로도 벌써 황혼빛으로 물든 세월의 냄새가 쓸쓸히 묻어난다. 틀림없이 무슨 열차 정거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노경에 접어든 주인공의 애잔한 삶의 이야기일 것이리라.
인생이라는 나그넷길의 끝자락에서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중간기착지로서의 의미를 지닌 그 연극의 명칭이 일순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해질녘의 간이역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 멀리 꼬리를 감추며 사라져 가는 기차의 뒷모습이 이내 자욱한 정경으로 눈앞에 흐려져 온다.
세상이 온통 볼거리로 뒤덮여 가고 있다.
볼거리를 파는 극장 같은 곳이 시나브로 번성하는 동안, 생각거리를 파는 서점 같은 공간은 점차 쇠락의 길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이것도 어쩌면 하나의 천이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극과 뮤지컬 사이에도 이러한 천이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수천 년의 기나긴 역사를 지닌 연극이 고작 백 년 남짓한 나이밖에 되지 않는 뮤지컬에 밀려나 차츰 설자리를 잃어간다. 연극 공연장은 파리를 날리는 반면 뮤지컬 공연장은 북새통을 이룬다.
요즘 사람들은 왜 그리 연극을 외면하고 뮤지컬에 열광하는 것일까.
짧은 소견인지는 모르겠으되, 복잡하게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하고 진득하니 참아 내지를 못하는 현대인의 속성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두들 떠들썩하고 부박한 볼거리에만 마음을 빼앗길 뿐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보며 침잠의 시간을 갖는 데는 관심사를 두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오래 전부터 뮤지컬보다는 연극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자아류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곰팡내 나는 믿음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마 세월이 흘러도 이러한 신념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뮤지컬은 도무지 몰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조금 빨려들려고 하면 그 순간 귀청을 찢을 듯 요란스러운 노래가 흘러나와 막 꾸기 시작한 꿈을 산산조각 내어 놓고 만다. 뮤지컬이 즉석식품이라면 연극은 발효식품인가 한다.
뮤지컬은 찰나적인 예술이어서 도무지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쩐지 진정성도 부족해 보인다.
연극은 수렴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뮤지컬은 발산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연극을 보고 나면 그 여운이 오래오래 간직되지만 뮤지컬은 볼 때 그때 뿐 그 잔상이 금세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다.
뮤지컬이 우선 보기에 흥미는 유발시킬 수 있을지언정 삶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예술적 값어치에 있어서는 연극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고 했듯이 무엇이든 사라져 가는 것은 애틋하게 여겨지기 때문일까.
술집이 들어서면서 하나 둘 삶터를 떠나는 실향민처럼, 뮤지컬이 득세하면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연극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
무릇 그 어떤 예술이든 항시 마니아층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든 그들이 버티고 있기에 연극의 생명은 영구할 것이리란 굳은 믿음을 갖게 된다.
부디 그들만이라도 시속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기를, 그리해 연극을 오래오래 아끼고 사랑하면서 지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으려니 마음은 어느새 극장으로 줄달음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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