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주산에 오른다. 등성이에 졸로롬히 잠들어 있는 고분들 곁에 서서 고령 읍내 전경을 바라다본다. 저 멀리 동남쪽으로 금산이 한 폭의 비단처럼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가야산에서 발원한 회천이 유유히 흘러간다. 회천을 끼고서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앉은 크고 작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 아늑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풍경이다.
고령을 모르는 이들 가운데는 ‘고령高靈’하면 ‘고령高齡’을 연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그렇게 인식하는 것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퍽 답답하게 느껴진다. 일일이 설명을 해 주자니 그것도 할 짓이 못된다. 고령은 나이가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고령高齡’이 아니다. 높고 신령스럽다는 의미를 지닌 ‘고령高靈’이다.
이 ‘高靈’이라는 명칭은 우리 역사에도 등장한다. 경기도 파주에 가면 고령산이 있고, 그 산 자락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이름의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보광사는 신라 말 도선 국사에 의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이름이 ‘고령사高靈寺’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 시대에 이르러 영조가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의 원찰로 삼으면서 ‘온누리에 두루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비추이는 절’이라는 뜻을 지닌 보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高靈’은 한자의 뜻 그대로 아주 상서로운 이름임에 틀림이 없다.
요즈음 각 지자체마다 고령화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1960년대 이후 불어닥친 이농현상의 여파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데다, 출산율의 저하로 인해 그 존립마저 위협 받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아 가는 곳도 적지 않다.
고령도 한때는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이름에 걸맞지 못하게 ‘고령高齡’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미풍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한창 비상을 꿈꾸며 꿈틀거리는 고장으로 탈바꿈 중이다. 사방팔방으로 시원스럽게 갖추어진 교통망에다 대도시와 인접한 지리적 여건 덕분에 농공단지를 비롯한 각종 생산시설이 앞 다투어 들어서고, 젊은이들의 귀농 귀촌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런가 하면, 행정당국은 당국대로 큰 그림을 그리면서 발전의 견인차 역할에 제 몫을 다한다. 지역민들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전하도록 밑자리를 깔아 주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거기다 물길이 바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도록 하는 데 지역의 언론기관도 톡톡히 한몫을 보태고 있다. 이런 일련의 추세로 해 고령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활기에 넘친다.
머잖아 주산 등성이에 자리한 대가야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날이 오면, 대가야국의 옛 명성을 되찾아 다시 한 번 눈부신 도약을 이룩하리라. 그와 때를 맞추어 삼국 시대가 사국 시대로 바뀌도록 하는 우리 고대사의 재정립 작업이 한층 탄력을 받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확실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일천오백 년 전 대가야가 신라에 복속만 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찬란한 문화의 자취가 남아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불행하게도 나라를 잃은 탓에 그 찬란했던 역사의 흔적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멸실되거나 파묻힌 역사와 문화의 복원 작업에 지금 고령은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일이 순조롭게 성과를 거두는 날, 고령은 또 한 번 우뚝한 이름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고령 사람은 대가야의 후예이거나, 아니면 그 복된 땅에서 살아가는 이이거나 누구든 고령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것은 도자기의 원류가 된 토기 문화에다 우수한 철기 문화 그리고 탁락한 유교 문화까지, 전통의 맥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고장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에서이다. 거기다 대가야라고 할 때의 ‘가야’에서 따온 악기인 가야금은 또 얼마나 맑고 고아한 소리를 내는 품격 높은 문화유산인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거니와, 고령은 나이가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그 고령이 절대 아니다. 높고도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의미이며, 그리고 그런 이름에 참 잘 어울리는 고장이 바로 경상북도 서남쪽 끝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대가야의 수도였던 그 고령이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