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개구쟁이 어린 시절부터 등 굽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래알 같이 많은 추억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글감의 밑천이 된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 추억하는 것은 늘 가슴 뛰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는 추억이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어느 수필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추억이 가장 많은 사람이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게 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세월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본다. 아련했던 추억의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보자.

I.

햇병아리 교사 시절이었다. 첫사랑을 시작할 때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첫 발령을 받은 학교는 두메산골 초옥 같은 집이었다. 하늘만 빠꼼이 보이는 산속에 위치한 학교 건물은 그 동네에서는 그래도 제일 큰 집이었다. 산이 높아 계곡 또한 깊었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문 앞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의 군락은 학교의 역사와는 반대였다.

동네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높은 다리가 놓여 있어 마을 이름이 ‘높은 다리’ 또는, ‘고교동(高橋洞)’이라 불렀다. 자연부락 또한 지명이 특이했다. 큰 밭대기에 곡식이 50섬이나 소출이 나왔다고 해서 ‘쉰 섬이’,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긴다고 해서 ‘수침동’, 노루 뿔 같이 생긴 계곡이라고 ‘장각골’, 서쪽에 큰 재가 있다고 ‘서재동’이라 불렀다. 학교는 면 소재지에서 금방 독립한 6학급짜리로 운동장에 바윗돌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역사가 짧은 학교였다. 학교가 있는 ‘고교동’에 하숙집을 구했다. 두메산골에 총각선생이 왔다고 밤마다 동네처녀들이 구름 몰려 들 듯 했으니 당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초임교사라 4학년을 맡았다. 김기항, 김호진.... 유현숙, 배옥자, 반세기가 가까워 오는 지금도 출석부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맡은 반 맨 앞줄에 앉은 ‘*숙’이라는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와 유난히 푸른 콧물을 늘 달고 다니는 아이였다.

‘유**’이란 맏언니가 사건의 주인공이다. 지금 추억해 보면, 난쟁이 같은 키에 얼굴은 사각형이고 큰 편이었으며, 당시의 가격으로 얼굴을 리모델링한다면 수백만 원의 견적이 나올 법한 인물이었다. 총각인 나에게 관심이 유난히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학교에 출입이 잦았다. 내가 있는 하숙집에 놀러오는 것은 매일 밤이었고, 아이를 통해 고구마, 밤, 과일 등 먹을거리 선물은 계속 이어졌다.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하듯이 그런 그녀가 싫진 않았다. 동생이 학습 준비물을 빠뜨리고 왔다는 핑계로 학교에 오는 날도 많았다. 처음에는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물량공세인 줄 알면서도 받았지만 나중에 보상이 두려워 선물을 거절하며 대면하게 대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기야 공격적 선동으로 돌변했다.

짝사랑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한 말이던가. 그 수위는 점점 높아갔고 나중에는 유언비어까지 난무했다. 본인이 총각선생과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 말은 이웃동네로 불붙듯 번져갔고, 내가 조용히 불러 타일렀지만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학부모 회의를 열어 교장선생님께서 뜬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해결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심정을 알 것만 같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추억의 스캔들을 기억의 창고에 고이 갈무리 해둔다.

Ⅱ.

그 학교에서 4년째 되던 해였다. 새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을 맞았다.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은 노 교장님이었다. 사모님을 비롯하여 따님 둘, 막내아들과 같이 온 가족이 관사에 이사를 왔다. 나와 교감 선생님은 하숙집을 교장 관사로 옮겨 하숙을 했다. 무뚝뚝한 교장선생님에 비해 성격이 서글서글한 사모님은 객지에서 고생하는 나를 아들같이 대하며 음식을 입에 맞게 잘 해 주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의 과년한 따님은 사모님의 음식을 거들어 주며 신부수업을 배우고 있었고, 나머지 따님과 막내아들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에 와서 첫 번째 스캔들이 희미해 져 갈 즈음에 두 번째 사건의 주인공은 신부수업을 하는 따님이 된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긴 머리를 땋은 처녀였다. 그러나 얼굴은 친탁을 해서인지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옛말에 뚝배기 보다는 장맛이라는 말이 있다. 얼굴이야 별로지만 음식솜씨 만은 사모님을 닮았는지 대장 금이었다. 된장 담그는 솜씨도 유전되는 걸까. 된장과 간장이 맛있으니 어느 음식을 요리해도 밥맛이 좋았다. 같이 하숙을 해도 교감 선생님은 밥을 남겼지만 나는 밥그릇을 깨끗이 비웠었다. 밥 잘 먹는 것도 복중에 하나던가. 사모님과 따님은 나에게 좋은 점수를 주기에 충분했다. 따님도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날이 갈수록 달라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입가에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대해 주어서 그런지 나도 그다지 싫진 않았었다.

그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고향에 자주 가지 못한 나는 교장 선생님 가족들과 공휴일이면 자주 어울렸다. 그 따님 또한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워 보였고, 나 또한 객지에 혼자 있으니 외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나중에 그 일이 있고 난 후이지만 냇가에 다슬기를 잡거나, 공휴일에 산에 가서 더덕을 캐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는 충분했었던 같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교장 선생님 가족이 다 모인 방에 나는 불려갔다.

사모님 왈: “방금 우리 가족회의를 했는데 김선생이 밥도 잘 먹고 성격도 좋아서 우리 딸과 어울릴 것 같으니 사윗감으로 낙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견은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통행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가 덧붙여 “올 가을에 잔치하려면 된장을 많이 담가야 하기에 메주콩을 더 많이 쒀야 한다.”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상대방의 의사는 전혀 무시한 채, 그 말을 남기고 사모님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일방적인 의사결정이었다.

너무나 황당한 나는 혼자 고민을 하다가 같이 하숙을 하던 교감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교감 선생님은 같이 고민해 보자고 했다. 며칠이 지나간 뒤 교감 선생님께서 이런 제의를 했다. 고향에 다녀올 때 친구의 금반지를 하나 빌려 끼고 오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교감 선생님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주말에 고향에 가서 친구의 반지를 빌려 끼고 왔었고, 교감 선생님의 시나리오대로 연출하였다. 교감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께 “지난주에 김선생 약혼한 모양이던데요?” 라고 거짓말을 했단다. 그날 저녁 교장 선생님 가족에게 전달되었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따님은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듣고, 식음을 전패하고 울고 있었다. 그 일로 해서 하숙집을 옮겨야 했고, 따가운 시선에 그 학교가 있기 싫어졌다. 한 가지 더 참기 어려운 것은 교장 선생님 눈 밖에 나서 결재도 잘해 주지 않고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었다. 학기 도중이라서 정규 인사이동까지는 넉 달이 남았었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당시 잘 아는 지인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중간에 결원이 있으면 아무데도 좋으니 전출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읍내에 빈자리가 생겨 11월 1일자 전출명령을 받아 그 학교를 떠났다.

반세기가 가까워 오는 이즈음에 연극 같은 두 가지 사건들을 쓰면서도 혼자 웃음을 참아가며 글을 쓰는 자신이 우습다. 추억을 추억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이나 추억은 좋은 추억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나쁜 추억을 추억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일생을 살면서 좋은 추억만 차곡차곡 쌓아 두어도 짧은 세상인데, 나쁜 추억을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어 쌓아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신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 기쁜 일은 오래 기억할 수 있고, 슬픈 일은 빨리 잊어버리는 망각이 있기에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지 않겠는가.

강산이 네 번 바뀐 지금 아련했던 추억의 나무 두 그루를 가슴속에 고이고이 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