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소맷자락으로부터 먼저 오는 가을, 그새 달라진 바람살로 감지한다. 갈바람은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온몸을 전율케 하고, 영혼을 일깨운다. 가을은 소리 없이 왔다가 스멀스멀 사라진다.
금년은 유난히도 더웠다. 연일 폭염주의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에어컨 앞에서 설쳐야만 했다. 올해같이 더운 해가 또 있었을까. 그렇게 더웠던 기억은 금세 깡그리 잊어버리고 가을의 시간 앞에 서면 우리를 무릎 꿇게 한다. 그러나 아직도 햇살이 따갑다.
달이 밝은 가을 밤 창가에 서면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 그리움은 근원을 모르는 슬픔이다. 글쎄, 이것이 가을의 얼굴인가, 가을의 손짓인가. 소슬바람에 사르르 잎 떨어지는 가을나무 가지들을 바라보면서, 한차례 마음의 병 앓지 아니하고 그냥 무덤덤히 넘어갈 목석같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눈부신 가을 풍경을 눈앞에 그려 본다. 길가에 연약한 몸을 애처로이 휩쓸리며 가녀린 손짓을 하는 코스모스의 행렬, 군데군데 무리지어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가을꽃의 대명사 들국화의 애잔한 미소, 들녘에 지천으로 피어나 실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이름 모를 들꽃들의 백치처럼 순수한 아름다움, 붉게 타는 저녁노을보다 더 곱게 물들어 가는 빨간 단풍잎, 동장군을 대동하여 입성하게 될 찬 북풍에 금비를 뿌릴 태세를 갖추며 황금빛을 더해가는 노란 은행잎, 청명한 하늘에 점점이 떠서 저공비행을 하다가 지친 몸을 꽃잎에 살포시 내려 앉아 달콤한 휴식을 취하곤 하는 빨간 고추잠자리,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정겨운 합창이며,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들의 노래잔치!
가을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철학이 없었을 것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예부터 사람들은 가을의 긴 밤을 통해서 인생을 생각하는 깊이를 더했고 학문을 연마했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오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우리의 삶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가을에서 느끼는 감정의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아마도 빛깔은 같을 것이다.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면 구르몽의 시가 생각나고, 옛 추억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길에서는 신록의 계절이 회상되며, 인생의 여정과 동반된 느낌을 갖게 한다. 봄부터 흐르던 빛은 이제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아름다운 가을빛이 되었다. 세상 어느 한곳 버려진 곳 없이 행복이 곱게 물들어가는 가을, 이 대자연의 모습 앞에 마음이 경건해질 뿐이다.
십여 년 전 팔공산 자락의 조그마한 시골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퇴근길 갓바위 순환도로, 길가에 억새와 코스모스가 함께 어우러져 바쁜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억새와 코스모스, 서로 궁합이 맞는 상대인 것 같다.  억새가 억센 남정네의 카리스마가 있는 꽃이라면, 코스모스는 가냘픈 아낙네의 꽃이라고나 할까. 이 둘은 뭔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그해 가을 화왕산 억새 산행에서 하얀 가을 축제를 만났다. 억새의 군락 속 가을에 푹 묻혔다. 사람들이 그리운 걸까? 억새들이 무리지어 운다. 허준 선생이 나환자를 치료해 주었다는 움막집 세트장, 그 속엔 아무 것도 없고, 억새만 슬피 울 뿐이었다.
억새의 군락을 보면, “아~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는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생각난다.
억새는 하루에 세 번 모습을 바꾼단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억새, 붉은 저녁노을에 비껴 금빛으로 빛나는 금억새, 달빛을 머금고 피어나는 솜억새가 그것이다. 억새꽃이 떨어지면 이상스레 스잔해진다.   
억새가 와삭와삭 슬피 울 때면 왠지 마음이 쓸쓸해 온다. 인생의 황혼에 선 노인의 백발처럼 하얀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는 그들의 손짓에서 쓸쓸함이 묻어난다. 억새들은 무엇이 아쉬워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있을까.
  그 당시 이웃학교 운동회 구경을 갔었다. 학교 뒤뜰 화단이 온통 코스모스 밭이었다.  하도 보기가 좋아 이듬해 학교 실습지에 집단적으로 코스모스 화단을 만들고, 그 곁에다 억새 화단도 같이 마련했다.
초임교사 재직 시절, 아이들과 같이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교실 환경 꾸미기 대회에서 우리 반이 1등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질그릇 독에 가을 산야에서 꺾어온 온갖 풀꽃들과 억새와 갈대에다 형형색색 물감을 들여서 교실 구석에 꽂아 놓았다. 남학생들은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 가지를 꺾어와 벽에 걸었다. 풍성한 알밤 송이가지도 함께, 오색 단풍잎으로 수놓은 모자이크 협동화, 노란 은행잎으로 엮은 방석이며, 솔방울로 만든 할아버지 담뱃대, 오곡백과를 광주리에 소담스럽게 담아두고, 요리조리 조형하여 모빌을 만들고, 알록달록 유리창에는 칼라 글라스로 장식을 하였다. 덕분에 1등한 상금으로 반 아이들과 풍성한 파티를 열었던 기억이 아련한 옛 추억으로 남아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만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늘어진 수수 이삭에 참새 떼 입질이 사나워질 즈음, 발갛게 물든 감나무 잎이 울긋불긋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단풍 중에 제일 아름다운 단풍이 무슨 단풍일까? 나는 감나무 단풍을 첫째로 꼽고 싶다. 비록 화려하진 않으나 빨갛게 물든 감나무 단풍은 참 곱고 아름답다. 단풍잎 빛깔은 곱고 화려는 하지만, 감 단풍은 수수한 중년 여인의 화장하지 않은 모습이다. 감나무 밭을 지나칠 때면, 은은한 여인의 향기가 풍긴다. 감단풍의 낙엽을 태우면, 중년 여인의 향수 냄새가 난다.
감나무 밭길을 거닐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란 글이 떠오르고, 옛 연인과 거닐던 추억이 어른거린다. 그래서 난 화려한 단풍잎보다 감나무 단풍잎이 더 좋다.
어느 시인은 이 청정의 가을이 눈물처럼 슬프다고 했던가.  난 가을을 황홀하고 눈부신 낭만의 계절이라고 노래하고 싶다. 누우런 황금빛 들녁은 제외하고라도.
서늘한 바람을 맞고서야 꽃을 피우는 들꽃 들, 참으로 자연의 섭리는 오묘한가 보다. 구름도 조용한 이 결실의 계절에, 색깔고운 가을바람이 되고 싶다.
오래전 가볍고 또 가벼웠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
어디선가 소슬바람 한 줄기가 목을 간질이며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