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좀 늦은 시각에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뒷길을 가다 역사기념물 표지석 하나를 발견하고 평소의 천착증(穿鑿症)이 발동(?)하여 그걸 읽었다.
조선시대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軍器寺’ 터라고 써놓고 해설은 ‘군기사’로 적어놓았다. 이건 명백한 오류이다. ‘절 사’가 아니라 ‘내관 시’여야 하니까 말이다. 기회가 있으면 서울시청을 찾아 고쳐 주리라 맘먹고 있던 차에 갑자기 용무가 생겨 시청을 찾았다.
용무를 간단히 끝내고, 이왕 온 김에 전에 본 표지석 오류 문제로 민원실에서 담당자를 찾았더니 담당 부서를 명확히 안내하지도 못했고 위치가 어디이며 내용이 무엇이냐고 좀 까다롭게 묻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좀 번거러워 그냥 포기하고 청사 지하로 내려오다 보니 신청사 건축 때 발견된 그것이 바로 옛 군기시 터라고 안내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먼저 도착한, 나보다는 신수도 훤하고 식견도 있어 보이는 5~60대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관람객이 ‘寺’인데 한글은 왜 ‘시’로 썼느냐고 그들끼리 오류라고 하나같이 질타하고 있었다. 보다 못해 내가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내가 설명하지요. 원래 한자는 동자이음(同字異音)이 많지 않습니까. 사찰을 나타낼 때는 ‘사’이지만 조선시대 병기, 기치(旗幟) 등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기구를 쓸 때와 그 기구의 벼슬아치는 ‘시’로 쓴다고 설명하고 ‘거북 구(龜)’자는 ‘귀’ 또는 ‘균’으로 읽어야 할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했더니 그 중 한사람은 그건 맞는다고 하기도 했다. 아는 체 하는 김에 더 설명하려, 궁중의 가마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寺) 한명회(韓明澮)를 설명하려 했더니 좀 머쓱했든지 어느 새 자리를 뜨고 마는 것이었다.
하고 많은 동자이음을 다 들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寺’와 ‘寺’같은 이런 경우는 한 글자 오용의 문제가 아니라 자그만 역사의 문제이기 때문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전래의 성씨가 275개에 달한다는데 그 중 어느 한 성씨는 대기만 하면 이른바 이름난 양반 가문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성씨가 있다. 그런데 그 문중 가첩을 봤더니 친족의 세대를 구분하기 위해 쓰는 항렬(行列)을 ‘행렬’로 써 놓은 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그 문중 지명도로 봐서 그걸 모를 그들 성씨는 아닌데, 짐작컨대 한자 세대가 아닌 한글 세대가 주관하고 간행한 것으로 치부하고는 말았지만 역시 지금은 아주 일부가 한자를 배척하는 세태이니 그 결과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좀 개운치 않았다.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음보(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자리를 얻음)로 받은 미관말직 경덕궁직(敬德宮直)에서 사복시 소윤에 오른 한명회는 일세를 풍미했던 大정치인임에는 틀림없으리라. 만년에 한강 가에 정자를 지어놓고 오리와 갈매기를 벗을 삼아 시문으로 소일했으니 호가 압구정(鴨鷗亭)이요 바로 오늘의 압구정동이 되지 않았나 말이다.
압구정하면 그 이름만으로도 어떤 의미로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지명이니 이 글 취지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장삼이사의 소시민으로선 좀 야릇함은 숨길 수가 없음은 왜 일까. 부동산 개발 시대에 어느 특정 지역은 ‘보상금 부자’가 밤사이 생겨나 그 동네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었다. 압구정 얘길 이 얘기와 연결시킨다면 내가 지나친 ‘자기비하’가 되는 것일까?
나의 선조인 ‘화약의 아버지’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 최무선(崔茂宣) 公은, 화약제조와 병기를 담당하는 군기시에는 직급이 ‘제조(提調)’였는데 어느 문헌을 보니까 직급 제조를 ‘製造官’으로 적어놓아 정말이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었다. 간행물이란 최초의 자료를 보고 참고로 인용하거나 또는 전문 전재하는 과정에서 미쳐 확인도 하지 않으면 오용.오류가 발생하는 것이 통례이다. 특히나 역사 기록물에서의 그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 할 수밖에 없다.
좀 오래 전의 얘기이다. 아내의 인감증명을 떼러 주민센터를 갔다. 대리인이어서 관계를 ‘夫’로 썼더니 40대로 보이는 그 직원, 신청서 한 번 보고 나 한 번 보고는 “나이가 맞지 않는 데요…”했다. 아마도 夫를 ‘父’로 착오를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순간의 헤프닝이었다.
내 젊은 날 군 논산훈련소에서의 일이다. 고지에서 교육 시작하기 전 조교가 ‘만성에 높은 자리…’라는 노래 한 곡을 꼭 부른다. 그런데 ‘만성’인데 왜 자꾸 ‘만승 만승’하는가 좀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 조교가 경상도 사람이면 그곳 특유의 발음 때문에 그렇다곤 하지만 분명 서울 출신이니 그것도 아니라고 나 혼자 판단했다.
정작 그 의문은 4,50년이 흐른 후에야 풀렸다. 잡문 수준이지만 명색이 문사(文士)인데 그 값을 하느라 이것저것 섭렵하다 보니 만성이 아니라 ‘만승(萬乘)’임을 알았다. 참으로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만승은 일만 대의 병거(兵車- 여기서도 거.차 동자이음인데 일제가 우리말에 혼란을 주려 ‘자전거’를 ‘자전차’로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중국 천자.황제(天子.皇帝)가 병사와 수레 일만 대를 거느린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식자우환이 아니었나 생각하니 쓴 웃음만 나온다.
돌이켜 보면 내 어문생활에서 이런저런 예는 많이도 있었다. 다 열거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끝으로 한 가지. 사찰에 가보면 ‘道場(도량)’이 있는데 불도를 닦는 곳, 즉 석가가 성도(成道)한 땅이라고 하여 도장이 아니고 ‘도량’으로 쓰고 있음도 아는 분은 제외하고 모르는 분을 위해 말하고 싶다.
한자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피해갈 수도 없고 피해 가면 원활한 어문생활을 할 수 없으니 어려워도 배워야 함이 정상이 아니겠는가. 한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문화 가정의 귀화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역시 존칭법이라고 실토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글 쓸 때마다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어디 한둘일까만 특히 그 중에는 띄어쓰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오늘도 끼적이고 있다. 내국인도 이러한데 귀화인이야 오죽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