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다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았다. 
이 뜻 깊은 날이 내게는 하나의 아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유달리도 손자 사랑이 깊으셨던 할머니가 하필 이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신 탓이다. 
그러기에 신심 깊은 불자이신 어머니나 나나 이날만은 절을 찾지 못하고, 언제나 집에서 가까운 친지들과 모여 제사 준비를 하면서 할머니 돌아가시던 때의 이야기와 생전의 추억담만 더듬으며 조신할 뿐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스물 몇 해가 흘러갔다. 
이만큼의 세월이 격했음에도 돌아가시던 그날 밤의 기억은 조금도 색이 바래지 않은 채 내 의식의 심연深淵에 선연히 살아 있다. 
그날 밤은 유달리 청명한 하늘에 보름을 앞둔 달이 환하게 밝았었다. 
어머니가 사랑채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나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꿈결 같은 속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물기 머금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휘영한 달빛이 격자창을 통해 어우러지고, 마당 한가운데 지펴놓은 모닥불이 지향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당신께서 잠들어 계신 안방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할머니는 구들목에서 벽 쪽을 향한 채 돌아누워 계셨다. 
곁에는 갓 노년에 접어든 동네 아낙 일여덟 분이 빙 둘러앉아 희미하게 밝힌 촛불 아래서 이마를 맞대고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수의를 만드는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그분들이 내게 할머닐 한 번 불러 보라며 타일렀다.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몇 차례나 망설이다, 거듭된 채근에 마지못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할―머―니―” 
하고 불러 보았다. 
대답 대신 야릇한 정적만이 방 안을 무겁게 채웠다. 두 번째, 세 번째 부름에도…….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던가 보다. 
도무지 실감이 되지 않았다. 그냥 곤히 잠들어 계신 듯 온화한 표정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흰 천으로 덮어 병풍으로 가려 둔다는데, 그땐 왜 잠드신 그대로 놔뒀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신께서 생전에 손자 사랑이 유별났음을 나는 지금도 뿌듯한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어릴 적부터 몸이 유달리 허약한 탓에 나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할머니는 이런 손자를 둔 덕분에 고향 마을에서 십 리도 더 떨어져 있던 약방을 내 집 드나들 듯 들락거리셨고, 어떨 때는 경기驚氣가 들어 사색死色이 된 손자를 들쳐 업고는 후미진 산모롱이 길을 돌고 돌아 침쟁이 할머니를 찾아가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내가 세 살 들던 때에 마른 김을 삼키다 목구멍에 걸리는 바람에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모두들 가망 없다고 했고, 어머니는 살릴 생각을 단념한 채 강보에 싸서 밀쳐 두었더란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어디서 주웠는지 할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까만 개똥을 구해 와 달여 먹이셨고, 한참 후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기적적으로 깨어났다고 했다. 
지금도 가끔씩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으면 지난날 당신의 손자 사랑이 간직된 그 ‘개똥약 이야기’를 꺼내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곤 한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등굣길에 나의 손을 잡고 교문까지 데려다주시고,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언제나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손자의 책가방을 받아 쥐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부모님이 여러 차례 간곡히 말씀을 드려도, 당신께서는 그리 하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시는 성미였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내 나이 겨우 아홉 살 철부지였다. 
어머니가 내게 상복을 입히려고 들었다.
장손이어서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입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색이 바랜 듯 누런 광목천으로 만든 상복이 어린 마음에 왠지 거슬렸던 모양이다.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맺혀 방울방울 떨어졌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오는 슬픔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닦달이 싫어서 흘린 눈물이었다. 
결국엔 입기는 입었지만……. 지지리도 못난 불초 손자였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을 헤아리지 못한 유치함 때문이었으리라. 
‘어리다’는 말은 사실 ‘어리석음’이다.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눈곱만큼이라도 분별심이 있는 나이였더라면 어찌 그처럼 지각없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두고두고 한스럽고 길이길이 가슴 한 켠에 멍울을 지울 일이다. 
한식이 와도, 추석이 돼도 성묘 가는 일을 거를 때가 다반사이다.
직장 일에 바쁘다며, 동기회 모임을 핑계로, 심지어는 산소가 너무 후미진 곳에 있다는 등의 자질구레한 타령을 늘어놓는다.
마음이 천 리면 지척도 천 리며 마음이 지척이라면 천 리도 지척이라고 했다. 
마음에만 있다면 하찮은 핑계 따위가 무슨 걸림이나 될 것인가.
오로지 성의 부족이며 또한 숨 가쁘게 돌아가는 힘겨운 세상살이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변을 돌아볼 작은 여유조차 잃어버린 채 의미 없이 살아가는 탓이 아닐까. 
그토록 각별했던 할머니의 손자 사랑에 대한 갚음이 고작 이 정도인가.
이런 생각이 빈 가슴을 적셔 올 적마다 뭉클 뉘우침의 눈물이 솟구치곤 한다.
명년 한식날에는 꼭 당신의 무덤 자리를 찾아뵙고 못다 한 죗값을 반 푼어치나마 갚아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