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내일모레 앞으로 다가왔다. 텔레비전이며 라디오며 신문 같은 대중매체에서는 연일 민족 최대의 명절이니 기차역과 고속버스 터미널의 귀성 풍경이니 하는 틀에 박힌 뉴스로 분위기를 띄운다. 백화점이며 대형 할인매장 같은 유통가에서는 가지가지 선물용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손님맞이 채비를 끝냈다. 이렇게 외형상으론 제법 떠들썩하니 명절 분위기가 풍겨 나오는데도 어쩐지 예전 같은 신명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유독 나만의 뒤틀린 정서 탓일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지난날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 2학기 국어책에 실려 있었던 ‘추석’이라는 글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선연히 떠오르곤 한다.

  “추석이 가까와졌읍니다.
  들에는 벼가 익었읍니다. 
  밤도 익었읍니다. 
  감도 익어 갑니다. 
  즐거운 추석이 옵니다.
 
  어머니가 새 옷을 만듭니다. 
  우리들의 옷입니다. 
  추석에 입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새 신을 샀읍니다.
  우리들의 신입니다.”

요즈음과는 철자법마저 사뭇 달랐던 그 글의 구절구절들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흐른 오늘 이 순간까지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서 그때 그 시절을 되살려 준다. 
얼마나 손가락을 꼽아 가며 기다리고 기다린 명절이었던가. 이런 날이면 그동안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한 색다른 음식도 실컷 먹을 수 있고 평소 입고 싶어도 입지 못한 멋진 새 옷도 신나게 입을 수 있으니, 그렇게 고대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동심이었으리라. 이따금씩 선물처럼 주어지는 세시풍속이 있었기에 어린 시절이 마냥 행복스러웠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새마을운동의 기치로 내건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에 힘입어 내남없이 피죽도 얻어걸리기 힘들었던 생활 형편들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한껏 풍요를 노래 부르며 산다. 
헐벗고 굶주린 그때 당시와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안락한 집에서 지내며, 값비싼 옷에다 맛난 음식에다 옛날의 왕후장상보다도 더한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요새 세상에 어느 누가 추석이 왔다고, 설날이 됐다고 따로 때때옷을 사며 설빔을 해 입는가. 
지난날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는 말로 추석을 맞는 넉넉한 마음을 노래했었지만, 지금은 일 년 삼백예순 날이 노상 명절이라 해도 그다지 지나친 소리는 아닐 게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쉬 감동하지를 못한다. 아니,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잃어버렸다는 말이 오히려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일 년 내내 명절처럼 지내는데, 구태여 명절이라고 해 특별히 찾아서 챙길 일이 무에 있을 것인가.
예부터 우리 조상들이 철 따라 세시풍속을 지키면서 전승시켜 온 그 의미를 헤아려 본다. 절기에 맞추어 행한 세시풍속은 이 땅에 발붙이고 생을 영위해 간 사람들의 마음의 정화장치였다. 매일같이 삶에 부대끼고 일상의 무게로 짓눌려 고달프게 지내다가도, 고통지수가 목젖까지 차오를 시기쯤 되면 때맞추어 펼쳐지는 세시풍속에서 잃었던 활력을 되찾곤 했다. 그러고 보면 세시풍속이란 어쩌면 우리들 영혼의 씻김굿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얼마나 좋아진 세상인가. 우리는 지금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득달같이 대령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다. 아쉬운 것이 없으니 자연히 귀한 줄을 모른다. 쌀을 풀이 아닌 나무에 달리는 열매로 알고 있는가 하면, 밥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럼 밥 대신 라면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게 요즈음의 아이들이다. 이런 의식구조를 지닌 그들에게서 무슨 애틋한 정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부족함을 겪어 보지 아니하고 자란 탓이다. 그 아이들의 차가운 가슴에다 무엇으로 온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으려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어느 종교의 귀한 가르침 한 구절이, 오늘날처럼 너무 넘쳐서 오히려 탈인 물질의 풍요 시대에 새삼 의미 깊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