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황혼은 빌딩 숲 그림자로 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녁노을을 이고서 구릿빛 얼굴처럼 번들거리던 가로변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이윽고 어둠 속으로 잠겨 들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땅거미가 깔리고 초여름의 후텁지근한 열기는 많이 누그러들었다. 
  Y대 병원 정문을 막 빠져나와 안지랑 네거리 쪽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하루하루 가까워져 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실랑이를 벌이며 이승과 저승의 어름을 넘나드는 어느 친지분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생과 사의 문제에 골똘해 있었다. 우리 이렇게 머물다 훌쩍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저승이란 곳이 정녕 있기는 있단 말인가. 있다면 거기서도 밥은 먹고 잠은 자고 꿈은 꾸는 것일까. 서로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할까. 이런저런 부질없는 상념으로 걸음걸이는 한층 느려졌다. 
  그 찰나였다. 머리가 온통 눈빛처럼 새하얀 백여우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눈앞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휑하니 달아난다. 나와 불과 한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둔 거리였다. 자전건지 오토바이인지는 기억에 가물가물하지만 무언가 탈것에 의지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번잡한 대도시에 여우가 다 출현하다니. 그것도 한밤중도 아닌 저녁 무렵에……. 천년까지 되진 않았겠고 백 년은 넉넉히 묵어 보이던 여우. 생래적으로 강심장을 타고나지 못한 탓도 있겠고, 또 중환자실을 들러 본 사람이라면 알 일이지만, 병문안 이후에는 으레 많이 심약해 있기 마련이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필이면 그 시각에 백여우를 만났으니……. 가슴이 쿵쾅쿵쾅 두방망이질 치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드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어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물체의 뒷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제서야 깨닫게 된 일이지만, 그건 여우가 아니라 백발로 물을 들인 스물 안팎의 한 아가씨였던 게다. 새빨간 티셔츠에 카키색 반바지 차림새가 나의 이런 추측을 가능케 했다. 치렁치렁 사자 갈기 머리를 하고 있었다. ‘원 세상에 어쩌면 저런―. 쯧쯧’ 나는 어이가 없어 껄껄 혀를 차고 말았다.
  불가佛家에서는 머리카락을 일러 ‘무명초無明草’라고 한다. 내 지난날 불교에 대한 소양이 그리 넉넉지 않았던 시절, 출가 수행승들이 구태여 삭발을 하는 까닭에 대해 적잖이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삭발을 하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을 법해서이다.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노출되었을 때 견디기에 무척 고통스러울 것 같고, 엄동설한의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엔 체온을 쉽게 빼앗겨 남들보다 더 혹독한 시달림을 당해야 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까까머리가 외관상으로도 썩 근사한 모양새는 아니지 않은가. 한데도 스님들은 왜 굳이 삭발을 고집할까. 나중에야 어떤 계기로 무명초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아, 그랬었구나.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하면서 크게 무릎을 쳤었다. 
  무명초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밝지 못하게 만드는 풀이란 뜻이다. 불가에서는 이 풀이 세상사의 수다한 사악함을 자라나게 하는 싹이 되어 우리의 삶터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스님들은 무명에서 벗어나 진아眞我의 세계를 지향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삭발을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신체 가운데 머리만큼 요랬다조랬다 갖은 변덕을 부려대는 부위도 아마 없을 성싶다. 무슨 무슨 행사라고, 혹은 이런저런 기념할 날이라며 어여머리니 트레머리니 쪽진머리니 하면서 한껏 멋을 부리고, 파마며 고데를 하고……. 동백기름이며 포마드며 무스 따위를 발라 반들반들 윤기를 낸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머리카락의 길이는 대체로 불량함 혹은 문제성 있음과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 같다. 감옥소의 죄수들에게 머리를 짧게 깎이는 것은 머리카락이 범죄와도 어느 정도 상관성이 있음을 시사해 주는 뚜렷한 증거가 아닐까. 
  학교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부 잘하고 온순한 모범 학생들은 대체로 머리 모양이 단정하지만, 성격이 거칠고 반항적이며 또래의 이성에나 신경 쓰는 이른바 문제 학생들은 머리 모양도 그에 걸맞게 볼썽사납다. 이는 어쩌면 타고난 성격 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머리 모양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어쩌다 청소년들이 많이 모여드는 장소에 가게 되면, 머리 색깔이 각양각색인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빨강머리, 노랑머리, 파랑머리, 초록머리……. 이건 그야말로 색채의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우리네 삶의 공동체인 이곳을 ‘여우들이 사는 도시’라고 나름대로 이름 붙였다. 그래 놓고 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썩 그럴싸한 명명 같다. 
  여우는 변덕의 마술사이다. 요랬다조랬다 해가며 갖가지 머리 모양과 색깔로 변덕을 부려대는 요사이 청소년들의 행태는, 필시 그러한 여우의 속성을 충실히 지녔음이리라. 
  머리 모양은 별개이지만 염색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된다. 미관상의 좋고 나쁨은 사람마다 가치관의 차가 있으므로 괄호 밖에 둔다 하더라도, 그건 우선 시간의 낭비를 가져오고 수질 오염 부하량을 가중시키는 장본인이다. 게다가 경제적인 문제는 또 어떤가. 한 번 염색에 그 비용이 얼마큼 드는지는 내 짭질찮은 성미 탓으로 여태 자세히 알아본 적은 없지만, 청소년 신분으로서는 상당한 금전적 부담이 될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아직 덜 발육된 청소년의 두피에 악영향을 끼쳐 머릿결이 푸석푸석해지고, 이것이 장차 탈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독성이 강한 염색약 성분이 눈을 자극하여 시력의 손상을 가져오기도 한다. 조심한다고 경계를 늦출 일이 아니다. 머리 감을 때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 고통스러워했던 경험을 지닌 분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리라.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다. 누구는 허옇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이 보기에 흉하다며 억지로 감추기 위해 까맣게 염색하느라고 야단을 부리는 판에, 반들반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를 백여우처럼 새하얗게 물들이는 짓은 내 알량한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 못 할 일이다. 
  검은 머리는 젊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러기에 이 꽃다운 시절에 겉모습 가꾸는 데 정력을 쏟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섭리에 대한 하나의 부질없는 도전이라 해도 좋으리라. 대신 독서며 음악 감상이며 봉사활동 따위의, 마음을 살찌우고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삶에 기꺼이 투자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내 장차 나이가 들어 머리에 흰 눈을 잔뜩 이고 살지언정 결코 새까맣게 되돌리고 싶진 않다. 꾸미고 감추는 일은 애당초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조물주의 섭리를 애써 마다할 일이 뭐 그리 있을까 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