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도 휘몰아치던 북풍은 차츰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른 시각 ㅈ시인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 왔다. 자기 집에서 점심 식사 한 끼를 함께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ㅈ시인은 숙성이 잘된 듯 윤기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맛깔스런 감주를 내놓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퇴색은 되었지만 창연한 고서들이 한눈 그득 들어온다. ㅈ시인은 방 윗목 구석에 쌓아둔 무엇인가를 열심히 뒤적뒤적하더니, 청록색 표지를 곱게 입힌 스크랩북 두 권을 내 무릎 맡으로 내놓으며 계면쩍다는 듯이 뒷머리를 슬슬 긁는다.
잔뜩 호기심에 부풀어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겨본다. 해방 이후 이 땅의 문단에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화려한 명성을 쌓았던 명망 높은 시인들에서부터 한 포기 들풀처럼 살다 간 무명작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의 육필로 쓴 시구들을 보면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들의 이름을 대할 때는 금방이라도 면전에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 이름들이 귀에 익어 정겹게 다가온다. 
상화 이상화李相和, 청마 유치환柳致環, 청록파 시인들,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그리고 김춘수金春洙, 김수영金壽永…….
내 아둔한 머리 탓에 그 숱한 이름들을 죄다 기억 속에 떠올릴 수는 없다.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길손들이 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생전에 남긴 유리알같이 명징한 시구들은 지금까지도 살아, 보는 이로 해금 생각에 젖게 만든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 금언이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진리임이 새삼스럽게 깨달아진다. 
문득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세월은 간단없이 흘러갈 것이고, 그 흐름과 함께 우리의 기억 가운데서 몰래 자라난 망각이란 놈에게 그 이름들은 자리를 물려주고 훌훌 떠나 버릴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간 그 이름들이 그리워져서 한 번쯤 더 불러보고 싶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 ㅈ시인이 남겨 놓은 이 스크랩북 두 권이 그 이름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료라면 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하고 보배로운 유산이 될까. 
나는 평생을 한결같이 신문의 의미 있는 기사들을 오려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온 대학 교수가 있음―지금은 이미 작고를 했지만―을 알고 있다. 그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몇 안 되는 강의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제하고 나머지는 온전히 스크랩북 만드는 일에 전념을 해 온 분이다. 전국의 이십여 일간지를 샅샅이 읽고서 먼 훗날 다시 볼 가치가 있을 만한 기사들을 일일이 오려 모은다고 했다. 이것이 당장은 대수로운 것이 되지 못할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세월이 격한 후면 분명 값없는 보배가 될 것임을 그분은 굳게굳게 믿고 있었던 때문이 아닐까. 진정 값진 보물이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나는 법이다. ㅈ시인의 스크랩북도 아마 이런 유가 아닐까. 
나는 느지막에서야 무언가 모으는 행위의 참가치를 조금씩 깨닫고 있다. 이전까지 무엇이든지 대수로 여기지 않고 지내 온 것은 아직 연륜의 일천함에서 나온 무지의 소치였으리라.
이십여 년 전, 우리 집에 돌두꺼비 한 마리가 있었다. 조부께서 소싯적에 비단 장사를 하실 때 비단 한 필과 맞바꿔 오신 것이라고 했다. 마치 석회석이 흘러내린 듯한 새하얀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석회석만도 아닌 것 같았다. 차돌보다도 석질이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 생긴 품이 두꺼비를 연상 판에 박았었다. 부라린 두 눈에 뭉툭한 코, 엉거주춤하게 네 다리를 벌리고 앉은 자태는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복두꺼비 그대로였다. 앞마당에 내다 놓으면 금세라도 엉금엉금 기어갈 것만 같았다.
한데 그 복두꺼비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에 할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채가 너무 낡아 헐고 새집을 지을 때 그만 땅속에 묻혀 버렸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손이 탔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저 무척 신비스러우면서도 익살맞아 보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집안의 행운을 예고해 줄 것만 같았던 복두꺼비, 그놈의 값어치를 진즉에 깨닫지 못했던 탓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사라진 복두꺼비 생각만 하면 아깝고 아쉬워서 가슴이 쓰려온다. 죽은 자식 귀 만지기라 했던가. 내 안목의 부족함이 그저 스스로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떠난 열차가 더 아름답고 놓친 물고기가 더 커 보인다더니, 잃어버린 돌두꺼비에 미련이 남는다. 이제 영영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그놈이기에. 
무엇인가를 모아 간직한다는 것은 값진 일이다. 그것이 어느 개인에게 한하는 편지 한 통이든 민족 전체의 관심사가 되는, 곳곳에 산재한 귀중한 문화재이든 그 여부를 가릴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모은다는 마음가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요 근래 내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이전까지는 무엇 하나 대수롭게 본 것이 없었다. 그저 건성 건성이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모은다는 일의 소중함에 눈뜨고부터는 길가에 널려 있는 돌덩이 하나, 산과 들에 자생하는 나무뿌리 한 줄기에도 애정을 갖고 혹시 쓸 만한 것이 없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유심히 들여다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