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인 조이스 킬머가 나무의 나이테를 인생 여정이라 풀이했다. 이를 본 우리 시인 고두현은, ‘사람은 나이테 대신 주름살을 새기며 나이를 먹는다. 나이테가 몸 안의 주름이라면 주름살은 몸 밖의 나이테다. 자애로운 미소와 웃음에서 나온 주름은 아름답고 품격이 있다’고 했다.
나이테 대신 주름살! 적어도 내게는 좀 아프게 다가왔다. 어느 날 딸애와 마주 앉아 전화기 쓰는 법 배우다가 딸아이 눈가를 무심코 봤다. 이게 웬 일인가. 눈가에 두어 줄 잔주름 가닥을 본 것이다. 평소엔 침침한 맨눈으로만 보다가 그날은 안경을 끼고 봤으니 있는 그대로를 본 것이다. 
어어! 너 언제 이렇게 늙었니…, 그 곱던 얼굴 주름살이라니…? 내가 놀라니 애가 아빠는, 내 나이가 얼만데… 하며 좀 멋적어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너도 쉰이 넘었구나. 그래도 부모 입장에서는 너는 항상 열 살 전후의 예쁜 얼굴로만 가슴에 평생 각인이 돼 있으니 그럴 수밖에. 누구나 제 아이 사랑하는 것 거기 무슨 이유가 있겠니.  
난 어쩔 수 없이 자식 자랑, ‘팔불출’이 돼야겠다. 너 첫돌 전부터 보는 사람들마다 다 예쁘다고 했다. 걸음 걷기 시작할 때 길을 나서면 모두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쁘다며 가던 걸음 멈추고 한참을 보다 가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세 살이나 됐을 때 제 할머니를 보고 ‘할머니, 우리 엄마 보러가자!’ ‘으응! 엄마 집에 있자나…?’ ‘아니 그 엄마 말고…’ ‘요년이 과자 먹고 싶으면 다리걸에 있는 엄마 보러 가잔다, 허허…’ 했다. 누구나 아이들 보면 놀리느라 ‘너는 다리걸에서 주워온 애야…’라고 하는 것이 아이 예뻐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주위로부터 몇 번 그런 말을 들었지만 한 번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그 말 거짓말인 거 내가 먼저 안다’는, 들은 척도 않는 모양새였다. 
정확히 다섯 살일 때는 대구에서 서울 외갓집을 데리고 갔다. 제 외삼촌을 만나려 그의 직장 앞 다방에서 대기하는 중 커피를 시켜 먹는데, ‘아빠 나쫌 도…’ 하는 것이다. 이를 본 아가씨(당시의 호칭), 저들 둘 끼리, ‘언니 제 좀 봐, 너무 예쁘다 그지…’ 하며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주는 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어린애로 보인다. 더구나 꼼지락거릴 때부터 열 살 전후가 부모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새겨져 있으니 그게 전부인 줄 알며 그게 평생을 간다. 그날 그 주름살을 보는 심정은 자연현상이었지만 자그만 충격(?)이어서 뭐라 내 심회를 표출할 길이 없다. 어쩌면 그만큼 허황해 그저 막연히 ‘세월 많이 흘렀구나…’밖에 없었다. 
중국 노나라 때 반의지희(斑衣之戱·부모 환갑잔치에 색동저고리 입고 춤춘다)의 고사가 있었다. 성년이 돼도 부모 앞에서는 애기가 돼 부모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린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아침 출근하는 아들 보고 첫말, ‘차 조심하고…’가 부모 마음이었다.
대학생 돼 첫 날 등교할 때 택시 합승(그땐 통상)을 했더니 먼저 탄 중년 부인이 저를 자꾸 보더니, ‘학생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학교 이름을 대니 ‘어, 그 학교 동창회장이 난데…, 내 아들은 지금 ㅇㅇ대학 다니는데 학생, 내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고 해 애가 놀라 내리고 말았다는, 그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애를 얼마나 예쁘게 봤기로 처음 보며 한 말 치고는 너무 경박도 했다고 제 엄마와 내가 주고받은 얘기도 있다.
3학년인가 됐을 때 애 생일날 축하 꽃바구니가 왔다. 귀가한 애에게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미팅에서 두어 번 만났는데 ‘프러포즈’를 했고 그래도 명쾌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는 S대생이고 고시 합격했다는 거다. 왜 거절 했느냐고 했더니 ‘우리 형편에 결혼예물(Key) 세 개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물론 저도 썩 내키지 않았음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땐 고시합격생 사위 보려면 ‘키 두세 개(아파트, 승용차 등)’가 화두일 때였다. 그런 일도 20여년 전 일이니 이젠 추억이 되고 말았다.
졸업을 앞두고 갓 창업한 아시아나 항공사에 1기 승무원 시험에 합격, 어금니도 발치하고 체중 조절과 의상 등 합숙 준비를 하는 중에 불합격 날벼락이 온 것이다. 울고 있는 애를 위로하며 제 엄마가 회사로 항의 전화를 했다. 회장이 외국 출장 중에 합격을 시켰는데 돌아와선 자기 친지를 합격시켜야 한다며 내 애를 탈락시켰다는 거다. 지금 같으면 회사에 가서 분탕질이라도 쳤을 것인데 그땐 민간이 관청엘 가면 ‘꿔다 논 보릿자루(관존민비?)’가 될 때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항공사가 국가기관은 아니었지만 ‘인격권’은커녕 이른바 묵시적 ‘갑과 을’이 엄존할 때이니 고스란히 수용하고 만 우도 범했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바보짓에 다름아니었다.
그랬는데 그 항공사 첫 비행하다 추락해 승객과 승무원의 인명 사고가 났다. 이를 본 제 삼촌은, ‘아 참, ㅇㅇ는 불합격 잘 했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게 바로 ‘인간만사 새옹지마’인가 보다.
결혼해 고교 교사로 임용된 한참 후 집에 왔다. ‘왜 그 예쁜 얼굴 화장 좀하고 학생 앞에 서면 어떠냐’고 물었던 일도 있긴 있었다. 대답은 ‘그냥…’ 뿐이었다.   
그 애는 지금 교직생활 충실히 하고 있으니, 멋쩍은 ‘팔불출’ 짓도 이걸로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