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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작은 물건이
곽 흥 렬 수필가 / 동리목월문예 창작대학 교수  |  webmaster@goryeo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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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8.12  16: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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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먼 곳을 여행할 일이 생긴다. 그럴 때면 엉뚱한 걱정거리로 며칠 전부터 신경이 곤두선다. 먹는 문제며 입는 문제도 물론 그렇지만,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역시 잠자리 문제이다.
누구는 왁자지껄한 시장바닥 같은 데서도 신문지 한 장만 깔고 누웠다 하면 채 몇 분이 안 돼 잘도 코를 드르릉거리는데, 내 무슨 까탈스러운 기질을 타고났기에 자리만 바뀌어 들면 도무지 잠을 청하지 못해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는 법이어서 그 차별성은 십분 수긍하면서도 이건 숫제 병적일 정도이니 난감한 일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소곤대는 속삭임에도 나의 귀는 더듬이처럼 예민한 감관感官이 돼 수면을 방해한다. 심지어 한집에서조차 방이 바뀌면 잠을 설치는 판에 잠자리 자체가 옮겨지면 오죽하랴. 더구나 단체 여행의 경우, 동숙同宿하는 사람 가운데 혹 트럭 엔진의 공회전 음이나 드럼통 굴러가는 소리같이 요란한 코골기를 하는 이라도 섞여 있으면 곤욕은 극에 달하고 만다.
수양의 부족 탓이려나. 이럴 땐 아무리 청하려 애를 써도 잠은 갈수록 달아난다. 답답한 마음에 하나 둘 셋 넷…… 열까지 숫자를 되풀이해 세어 보기를 수백 차례, 일부러 즐거웠던 지난 일들을 더듬어 보기를 또 몇 시간. 하지만 도무지 이 코 고는 소리 앞에서는 갖은 방법이 다 헛수고일 따름이다. 결국은 하루 일진의 사나움 탓으로 돌리고서 체념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수년 전, 변산반도의 채석강彩石江 일대를 여행했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그 지긋지긋한 고통에 몸서리가 쳐진다.
해가 설핏해질 무렵까지 묵을 곳을 정하지 못해 헤매던 우리 가족은, 가까스로 해안선을 끼고 도는 순환도로에 면한 어느 모텔 하나를 잡아 여장을 풀었다. 겉모습은 비록 허름했어도 풍광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았다. 아!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알량한 인내심을 시험 받아야 했던 그 하룻밤의 극심한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허름하다 싶을 때 퍼뜩 감을 잡았어야 했다. 고통은 일찌감치 예고된 상황이었다. 그런 대로 묵을 만하게 여겨졌으면 그 늦은 시각까지 우리를 위해 얌전히 비워져 있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살갗에 끈적이며 감기는 눅눅한 바닷바람, 새벽녘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자동차 바퀴의 마찰음, 취객의 혀 꼬부라진 고함 소리, 해변 가 특유의 극성스런 왕모기 떼, 덜덜거리는 낡아빠진 에어컨……. 창문을 열어 놓을 수도, 닫고 있을 수도 없어 애꿎은 에어컨만 계속 켰다 껐다 되풀이하다가 온밤을 하얗게 밝힌 채 아침을 맞고 말았다.
밤새껏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천리 먼 길을 종일토록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귀갓길이 여간 고충이 아니었다. 정신이 흐리멍덩해져서 예기치 않은 사고라도 당할까 봐 오는 내내 조바심을 치지 않으면 아니 됐다. 지나간 밤 귀마개의 도움만 받을 수 있었더라면, 다음 날 하루가 줄곧 얼마나 즐거운 여행길이 되었을 것인가. 지금 생각하니, 크기로 말한다면 손가락 마디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며, 금액으로 따지자면 몸피 굵은 무 한 개 값어치도 되지 않는 고 작은 물건이, 어쩌면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한을 지니고서 천금의 무게에 값할 수도 있었겠다 싶다.
어느 해 초가을이었던가 싶다. 우연히 남부도서관을 들렀을 때, 귀마개를 틀고서 독서삼매에 빠져 있는 한 단발머리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아니하는 듯 너무도 평온하고 여유로운 표정, 나는 시중에 귀마개란 물건이 팔리고 있는 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아, 바로 이거였구나. 이 작고 하잘것없어 보이는 물건이 기막히게 유용한 쓰임새를 갖고 있는 게로구나.’
그 깨달음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상살이에의 새로운 눈뜸이 돼 주었다.
작아서 종요로운 것이 어찌타 귀마개뿐이랴. 핀셋이 그렇고, 손톱깎이가 그렇고, 콘택트렌즈가 그렇고, 틀니가 또한 그렇다. 사람이 많이 북적여 대는 공공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바짓가랑이의 실밥이 터졌을 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라. 어디 가까운 데서 당장 바늘과 실을 구할 수 없다면 얼마나 곤혹스러울 노릇인가.
무릇 만상은 그 어떤 존재이건 필시 쓰임이 있어 세상에 생겨난 것, 다만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존재 가치의 성패成敗가 갈릴 따름이다. 귀를 후비는 데 굵은 막대기가 소용 닿을 수는 없듯이, 가래로 막을 구멍을 호미로 막을 수는 없듯이, 물건이란 저마다 적재적소에서 제 타고난 역할에 충실할 때 더없이 소중하고 값진 법이리라.
사람살이의 이치인들 이에서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모두가 대통령이고 모두가 장관이고 모두가 사장이라면, 누가 길거리의 낙엽을 쓸고 누가 화장실의 오물을 치우며 누가 공장의 기계를 돌릴 것인가. 제각각 자신이 선 자리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할 때 보석처럼 소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 묵어서 오히려 곰삭은 묵은지 같은 말이 오늘따라 새삼 의미 깊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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