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오자 거리가 형형색색의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한층 환해졌다. 즐비하게 늘어선 음식점 골목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가는 해를 아쉬워하는 마음은 다들 비슷한지 한 그릇 밥, 한잔 술로 고달픈 삶에 위로를 주고받으며 가슴속의 허기를 달래려는가 보다.
고향 동기회 부부 동반 송년모임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잠시 노년의 언저리로 접어드는 나이임을 잊고서 한창 갈기를 휘날리던 이십 대 후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고 나자, 이런저런 세상잡사를 안주 삼아 왁자그르르한 이야기 소리가 방 안 가득 넘쳐흐른다.
이윽고 시켜 놓은 낙지볶음과 연포탕이 나왔다. 모두들 늦은 저녁 시간으로 출출하기도 한 데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고 지낸 탓에 정이 많이 고팠던가 보다. 입은 우걱우걱 음식을 즐기면서도 말은 쉬지 않고 식탁 위를 날아다닌다. 낙지처럼 질기고 연포탕같이 맑은 인연들이 이렇게 또 한 해의 우정을 쌓아 가고 있다.
한 삼사십 분 가량은 지났을라나. 뱃속에서 어지간히 포만감이 느껴졌다 싶을 즈음, 한 친구가 갑자기 다음에 또 보자며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평소 엉덩이가 무겁기로 무쇠솥 같던 벗이다. 여느 때와는 너무도 다른 그의 돌출 행동에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쏠렸다.
늘 모이기만 했다 하면 좌중을 들었다 놨다 분위기를 띄우는 친구가 이 상황을 두고 그냥 넘어갈 리 만무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여지없이 농 반 진담 반 한마디를 던진다.
“아따, 늦둥이 만들 일 있나. 뭘 그래 바삐 갈라 카노?”
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친구의 아내가 이 친구의 말을 받았다.
“늦둥이는 무슨 늦둥이. 내 몸 공장 문 닫은 지 벌써 오래 됐는데…….”
방 안 가득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 친구가 풀 죽은 목소리로 자기 아내의 말을 되받았다.
“공장 문 안 닫았던들 뭐 할 끼고. 기계가 고장나 버렸는걸.”
또다시 폭소가 쏟아졌다. 그 푸념 가운데 얼핏 세월 앞에 거역할 수 없는 쓸쓸한 회한 같은 것이 묻어났다.
사실 친구는 지난해 봄 직장에서 근무 도중 뇌경색 증세로 쓰러져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다행히 주위 동료들이 서둘러 응급조치를 취한 덕분으로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을 만큼 회복이 돼서 지금은 거의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육십 년지기 죽마고우들. 스무 살 청년이 되었을 무렵 사회의 일원으로 구석구석에서 다들 제 앞가림을 하고,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자 가정을 꾸렸다. 이 부부 동반 모임의 닻을 올린 것도 그 어름이었다. 그때가 꼭 엊그제만 같은데, 그새 어언간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바람에 쓸리듯 훌홀히 흘러 버렸다. 앞으로도 세상 하직하는 날까지 인생의 후반부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소중한 인연들이기에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다른 세상의 공장이 뭐가 그리 좋아 보여서 이승이라는 공장에 서둘러 사표를 던지고 만 것일까. 몇 해 전, 처음 모임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동기생들 가운데 하나는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가 남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친구야, 비록 그 공장 문은 닫혔어도 어쨌든지 인생 공장 문은 안 닫히도록 해야 한데이~!”
나는 취하지 않았으면서 괜히 취한 척 호기롭게 외치며 그를 배웅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자리에 함께한 벗들 모두 하나같이 나하고 똑같은 심정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흐려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