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왜 하필이면 겨울에 옷을 벗는 것일까?’
겨울나무를 눈여겨 바라본 사람이라면 아마 다들 그럴 것이리라. 굳이 철인哲人이나 사상가가 아니어도 누구든 한두 번쯤은 이 같은 의문을 품어 보았음직하다.
해마다 가을이 깊어지고 나무들이 낙엽을 죄 쏟아버리고 나면, 내게는 그러한 궁금증이 연례행사처럼 찾아온다. 뭇 생명들이 하나같이 두툼한 털옷을 겹겹이 껴입고서 바짝 자라목을 하는 계절에, 유독 나무들만은 내처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던지는 까닭이 대체 무엇일까. 어린아이 적의 호기심으로 그 연유를 캐묻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발동하곤 한다.
생각해 보라, 찌를 듯이 강렬하던 태양빛의 세력마저 혹독한 동장군의 기세에 눌려 무력해지는 겨울철 내내 여름날의 그 무성하던 잎들을 줄곧 그대로 달고 섰다고. 만일 그렇다면, 오로지 여윈 햇살 하나 의지하고서 이 버거운 시절을 근근이 버텨 내어야 하는 생명체들이 얼마나 더 혹독한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인가.
그렇잖아도 이 계절만 오면 평소 멀쩡하던 사람들조차 조금씩 기분이 우울해지게 마련이다. 이치가 그러하거늘, 거기에다가 햇빛까지 차단을 당한다면 마음의 병은 더욱 깊어질 게 뻔하지 않은가. 북유럽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증상이 유달리 흔한 것도, 겨울철이면 숙명처럼 겪어야만 하는 극야極夜 현상이 사람의 심신을 잔뜩 가라앉혀 놓기 때문일 것이다.
우울한 기분을 다스리는 데는 그 무엇보다 쨍쨍한 햇빛이 특효약이다. 항우울제 같은 인공의 치료약은 부작용이 있지만 이 천연의 치료약은 부작용도 없다. 햇빛은 신이 빚어내는 가장 완전한 마음 치유제이다.
아마도 그래서이지 싶다. 유럽 사람들의 햇빛 사랑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어쩌다 잠시잠깐씩 얼굴 드러내는 한줌의 겨울 해를 아쉬워하며, 도심 언저리의 공원이나 숲을 찾아 비키니 차림을 한 채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 그리 낯설지가 않다. 정신과 치료의 태반이 강렬한 빛을 쬐어 주는 지극히 단순한 처방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기에 어쩌면 겨울나무야말로 이 시절의 훌륭한 자연치료사라고 해도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니리라.
여름내 제 몸피보다 두꺼운 외투를 켜켜이 껴입고서 짙은 그늘을 만들어 삼복염천에 지친 나그네의 심신을 달래고 쉼터를 마련해 주던 나무, 계절의 폭군인 겨울이 침범해 오자 그들은 걸쳤던 옷을 훌훌 털어 버리고 마침내 허허로운 모습으로 홀로서기에 나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묵묵히 펼치는 희생정신의 발로가 아닌가. 자신은 비록 헐벗어 춥고 외로워 보일망정, 숲을 찾는 생명체들에게 그나마 엷은 햇빛이라도 받아들이게 하려는 느꺼운 배려의 마음이리라.
묵중하게 버티고 선 겨울나무에 그윽이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문득 지나온 삶이 되돌아봐진다. 내 얼마나 옳다는 믿음 앞에 굳건했으며 불의 앞에 당당하였던가. 매번 사철 푸르른 송백松柏의 지조 있음만을 두둔하면서, 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겨울나무를 변절자의 표상인 양 몰아세우려 들지는 않았던가.
그리고 또 되뇌어 보게 된다. 언제 한 번이라도 이 겨울나무처럼 아낌없이 자신을 내던진 적이 있었던가. 남이야 어찌 되건 말건 그저 내 한 몸의 안락을 위해 마음의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해 온 달팽이집 속의 삶은 아니었던가. 가슴에 손 얹고 헤아려 보니 적이 스스러운 마음에 고개가 꺾이어진다.
겨울나무의 이타행利他行을 본받으며 한세상 살아갈 수는 없을까. 옷을 죄 벗어버리고도 꿋꿋한 기상을 잃지 아니하는 나목들, 그 마음을 비운 모습에서 자연은 우리 삶의 말 없는 스승임을 저리게 깨닫는다.
고개 들어 다시금 겨울나무를 응시한다. 나무들은 지금 거룩한 경전을 펼쳐 나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