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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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소나무
곽 흥 렬 수필가 / 동리목월문예 창작대학 교수  |  webmaster@goryeo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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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5  10: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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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청량산淸凉山을 찾았다. 이십여 년을 벼르고 벼른 끝에 비로소 밟아 보는 봉화 땅이다. 청량사를 품에 안고서 병풍처럼 둘러쳐진 빼어난 산세며 골골을 감돌아 흐르는 무형의 기운이 풍수지리 쪽으로는 완전히 손방인 나이지만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품새로 다가온다. 항용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였던가. 그러한 속설은 대체로 들어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 말이 이곳에서만큼은 동의할 수 없는 소리일 것 같다.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와!” “와!”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옹기종기 이마 맞대고 앉아 있는 대가람의 전각들을 발아래 굽어보며 천천한 걸음으로 등반길에 오른다.
깊이 팬 골짜기를 건너고 가파른 등성이를 넘으며 팍팍한 다리를 타박거리길 약 한 시간 반 가량 지났을까. 8부 능선쯤에 이르자 군락을 이룬 소나무 숲이 눈앞에 나타났다. 꽉 쥐어짜면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들을 것처럼 빛깔이 청청하다. 온갖 공해에 찌들 대로 찌들어 생기를 잃어버린 대도시 변두리의 푸르죽죽한 소나무들과는 한눈에도 그 품격부터가 완연히 달라 보인다.
그것은, 그러나 크나큰 착각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피가 어른 허리통 굵기만 하다 싶은 그루들은 온전한 것을 찾기가 힘들 만큼 하나같이 밑둥치에 커다란 상처 자국을 안고 서 있질 않은가. 제대로 자라지를 못해 구불구불 외틀어진 형상이 마치 뇌성마비 장애자 같다. 세월의 풍상에도 질긴 목숨 부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다름 아닌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만행 탓이다. 그들은 사람한테는 물론이고 애꿎은 나무에게마저 이렇게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안겨 놓았다. 그들이 이 땅에서 쫓겨 간 지가 올해로 어언 반세기하고도 다시 이십여 년, 강산이 예닐곱 차례나 바뀔 만큼 기나긴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때의 상흔은 여기저기에 옹이처럼 박혀 그 참혹했던 민족의 비극을 말없이 증언해 준다.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라고나 할까.
  절통한 만행의 현장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이 높고 험악한 곳까지……. 만일 불행히도 그들의 수중手中에서 한 세기 가량만 흘렀더라면 이 강토, 이 산하의 숲이란 숲은 아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깡그리 망가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그들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가 하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주장을 펴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그 뻔뻔스러움의 끝이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일제의 발악은 극에 달했다. 총알을 만든다며 우물가의 세숫대야에서부터 어린아이들의 밥숟가락에 이르기까지 놋쇠란 놋쇠는 모조리 긁어갔는가 하면, 전투기 연료로 사용한답시고 소나무란 소나무에는 닥치는 대로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내어 놓았다. 송진을 정제해 비행기 기름을 뽑아내는 방법을 어떻게 알아냈던 모양이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끝끝내 알지 못했어야 좋았을 기술을.
이 산중턱의 소나무들도 그들의 손아귀를 피해 가지는 못했던가 보다. 밑둥치마다 하나같이 V자형의 빗살무늬 선명한 톱날 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다. 그 볼썽사나운 모습에 부르르 치가 떨리고 와락 분기가 솟구친다. 왜 송진은 품고 있어 그리 학대를 받아야 했던가. 거기서 기름이 나와 봐야 얼마나 나온다고. 병아리 눈물만 한 양에 지나지 않았을 송진 기름으로 버티면 얼마를 더 버티겠다고. 덕분에 입이 없어 말 못 하는 그 불쌍한 것들이 깊디깊은 산중에서 쓰라린 아픔에 오죽 괴로웠을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우리의 고통스러웠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영문도 모르고 느닷없이, 혹은 징용으로 혹은 정신대로 끌려가 차마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모진 핍박과 학대와 멸시에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던 가엾은 조상들, 제대로 자라지 못해 비틀리고 외틀어진 소나무들은 바로 그 시절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닌가. 꽃다운 청춘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저들의 흉포한 발길질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으니……. 그 원통함, 그 분노, 그 한스러움이 한 그루 한 그루 나무 나무마다에 고스란히 새겨져 상기도 울먹이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종류의 수목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소나무가 그처럼 수난을 당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만일 우연이었다면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히고 매가 찰 노릇이다. 아니, 아니다.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이렇게 불리는 애국가의 가사에서처럼, 우리 한민족이 예부터 소나무를 정신적 표상으로 삼아 오고 있음을 생각하면, 유독 소나무만을 골라서 괴롭힌 데에는 은연중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저들의 내밀한 흉계도 깔리어 있었음이 분명하리라. 아, 이 철천지원수들! 천추에 용서 못 할 오랑캐들! 비분한 심사로 허공에다 대고 울분을 토하며 불끈 종주먹을 날린다.
그러다가 다시 찬찬히 살핀다. 용케도 상처 입지 아니하고 하늘 높이 죽죽 뻗은 젊고 푸르른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온다. 이 소나무들의 우람찬 기상을 보면서 한 점 구김살 없이 자라나는 우리의 이세들을 떠올린다. 그 아이들이야말로 장차 이 나라, 이 민족을 짊어지고 나갈 대들보가 아닌가. 우리가 비록 문명개화에 한 발 늦었던 탓으로 한때는 일제의 가혹한 채찍질에 피눈물 흘리는 설움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었지만, 이제는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신세대들로부터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서 당당히 어깨를 겨루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충분한 자질과 역량을 읽는다. 이 꿈나무들이 있어 우리는 오늘의 밝은 희망을 말할 수 있으리라. 내일의 부푼 기대를 가질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이 들자 조금 전까지 울울하던 기분이 스르르 풀리면서 독한 술에라도 취한 듯 마음이 흥그러워 온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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