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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상덕(金尙德) ‘2·8독립선언 100주년’(2)이달의 독립운동가(2011.02.8.)로 선정
정민기 기자  |  news10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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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30  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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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金尙德) 선생은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하게 된다.
(젊은 동경유학생들이 기초해 발표, 일제침략행위의 역사적인 설명과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 등 폭로,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선언서 중) 학생 대표 11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된 선생은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재건과 중국 내 분산돼 있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의에 몰두하고, 만주에서는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띠면서도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전개되도록 주도하게 된다. 해방 후 국내로 귀국해서는 정부활동의 참여와 활발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1892년 저전동 태생의 김선생은 선생은 어려운 가정임에도 고향인 고령에서 한학을 배우며 유교적 소양을 갖추어갔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그만두게 된다. 이후 2년 뒤인 1915년 경신학교에 입학, 고학 끝에 1917년 3월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선생은 경신학교의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선생은 일본 도착 직후 동경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고 추청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기독교청년회(1906), 조선유학생학우회(1912), 조선학회(1915),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1915)와 같은 유학생 단체들이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곳이었다. 이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와 독립문제의 연관성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1919년 1월 6일에도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가 열렸다. 선생을 비롯한 연사들은 당시 세계정세를 한마디로 규정하고 있던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자주 독립을 달성해야 하며, 이처럼 숭고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강연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새벽 한 시가 지나도록 민족운동을 전개할 방법을 숙의하느라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이때 최팔용(崔八鏞)의 제안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학생대회를 통해 이를 발표하며, 국내외에 발송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학생대표를 선출했다. 선생은 11명의 실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따돌리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2월 8일에 열린 조선유학생학우회 임시총회에서 재빨리 단상에 올라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서둘러 선언했으며, 백관수(白寬洙)와 김도연(金度演)이 연이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했다. 참가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성을 울렸다. 하지만 서춘(徐椿)이 애국 연설을 하려 할 때 일본 경찰의 해산 요구가 있자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반항하면서 격투가 벌어져 집회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집회가 해산되는 과정에서 선생을 포함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모두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체포된 학생 가운데 17명은 정식 취조를 받았고, 선생을 포함한 9명은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됐다. 1919년 6월 일본 법원은 그에게 금고 7개월 15일을 선고했다. 선생은 1920년 2월 9일 출옥하였고 곧장 중국으로 망명하게 이른다.

   
 

선생은 1920년 3월 5일에 상해에 도착하게 된다. 다음 날 발간된 ‘독립신문’에서도 “6개월의 금고를 마치고 방면된 김상덕씨는 일전 무사히 상해에 래도하다(내도하다)”라고 그의 도착 소식을 전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 만 29세였다. 선생은 도착하자마자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된다. 의정원 신분을 유지하는 동안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56명의 한국 측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대회 도중에 열린 극동혁명청년대회에도 21명의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대회는 1921년 11월부터 미국이 주도해 열린 워싱턴회의에 대항하는 회의였다. 워싱턴회의는 소련을 배제한 가운데 중국문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열강 간 이해관계를 재조정한 국제회의였다. 소련은 여기에 대응해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국제회의를 조직한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에서는 계급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 계급운동을 벌이는 일이 아직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한국문제를 결의한다.
또한, 민족운동에 대중이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급운동자는 민족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임시정부가 실력에 비해 명칭이 과대하므로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무소속의 학생 대표로 참가한 선생으로서는 향후 활동방향을 잡는데 많은 시사를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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