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수면 위로 저녁 햇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린다.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에 찰랑찰랑 너울대는 물결이, 펼쳐 놓은 한 폭의 비단 같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청둥오리 가족이 유유히 헤엄을 치며 저녁 한때를 즐기고 있다. 낫질못 둘레길을 거닐면서 바라본 초겨울의 풍광이다.
낫질못에 둘레길이 들어선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군 당국에서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대가야읍 중화리 중화저수지에 생태습지를 비롯해 생태관찰데크며 소리숲, 생태둘레길 등을 포함한 생태공원 조성에 박차를 가해 이룩한 일차적인 성과다. 물론 낫질못의 정식 명칭이야 중화저수지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낫질못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중화저수지보다는 낫질못이라는 이름에 훨씬 정감이 가는 건 유독 나만의 취향일까.
낫질못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빠지지 않을 규모와 풍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지역의 명소다. 대구의 자랑거리인 수성못의 크기가 대략 6만 6천 평 정도라고 하는데, 이곳 낫질못은 그보다 훨씬 넓으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데 느긋하게 걸으면 한 시간은 넉넉히 걸릴 만한 거리여서 일상사로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에는 그만이겠다 싶다.
이곳 낫질에 못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의 일이다. 여름철의 가뭄에 대비해 농업용수가 긴요했던 당시로서는 저수지가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낫질못이 만들어진 뒤로는 그 아래 수십만 평의 천수답이 옥토로 바뀌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시간이 지나면 쓰임새도 변하는 법,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본래의 목적보다는 눈요깃거리로서의 기능이 더 쏠쏠하다.
‘낫질’이라는 이름은 얼핏 농사와 관련성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농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명칭이다. 낫으로 풀이며 곡식 따위를 벤다는 뜻을 지닌 그 낫질이 아니다. 낫질은 ‘나길’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본래 ‘비단 라羅’ 자였는데, 두음법칙현상에 의해 ‘라’가 ‘나’가 되고, 여기다 ‘길’이 붙어 ‘나길’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길’은 곧 비단길이라는 뜻이다. 이 ‘나길’에서 다시 ‘길’이 구개음화현상을 일으키면서 ‘질’로 바뀌어 ‘나질’이 되었고, ‘질’이 된소리로 나다 보니 중간에 사잇소리가 들어가 결국 ‘낫질’로 굳어진 것이다.
명소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게다. 사람도 아무 존재감이 없었다가도 어느 순간 유명인사가 되듯이, 처음엔 그다지 존재감 없는 장소였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입소문이 나고 관광객들이 다투어 찾아들면 자연 명소가 되는 것이 아닐까.
대구 달성군 화원읍 낙동강 가에는 천혜의 명승지인 화원동산이 있다. 그곳 북쪽 자락에 예부터 상화대賞花臺라는 이름이 전해 온다. 신라 제35대 군주였던 경덕왕이 가야산에서 병으로 요양 중인 세자 문병차 오고가던 이곳에다 행궁行宮을 두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꽃을 감상하던 곳이라 해 ‘상화대’라 불렀다 한다. 화원동산 언덕에서 바라보는 낙조落照는 어디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만큼 절경이다. 그래서 이곳의 빼어난 풍광을 읊은 상화대 10경賞花臺 十景이라는 한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 가야낙조伽倻落照, 곧 가야산의 해 지는 모습이다.
만일 누가 나더러 상화대 10경을 본떠 대가야 10경을 한번 정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제1경으로 망설임 없이 낫질못의 낙조를 꼽고 싶다. 동쪽 사면에 놓여 있는 산책길에서 조망하는 낫질못의 해넘이 광경은 가히 장관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수면에 이는 잔물결이 이름처럼 꼭 비단을 펼쳐놓은 듯 황홀해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고려 말의 문장가였던 김황원金黃元이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청류벽과 평양성 부근의 황홀한 풍광을 바라다보며 표현할 시구가 막혀 울면서 내려왔다고 했다지만, 나는 이곳 낫질못 둘레길에 펼쳐진 경치를 그려낼 만한 글재주가 모자라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그랬던가. 내가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은들 어디 직접 와서 보는 것만이야 하랴. 낫질못 둘레길이 궁금하거든 일부러라도 짬을 내어 한번 눈으로 확인을 해 볼 일이다. 그런 다음에 스스로 평가를 내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