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을 문 채 새록새록 잠든 손자를 바라본다. 새아기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천금을 준다 해도 아기와 맞바꾸지 않을 만큼 마음만은 부자다. 코끝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잘 익은 포도송이 같다. 세상모르고 평화롭게 잠자고 있는 하늘의 천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이기에 마냥 흐뭇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요즈음 날씨가 춥고 눈이 쌓이는 풍경을 보면 옛날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학창 시절 그 어느 날이었던가. 부모님 곁을 떠나 낯선 자취방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밖에 나가 차가운 눈을 한입 물고 졸음을 쫓고 허기를 달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이고 그 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부모를 탓하거나 원망해 본 적도 없다. 어렵고 힘들었던 세월이었기에 오히려 그립게 다가온다.
눈물 젖은 빵은 먹어 본 사람만이 알고, 젊을 때의 고생은 돈을 주고도 못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계절 철철이 농사지은 곡식과 과일을 보내올 때마다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리라.
추운 겨울 터질세라 짚을 깔고 반들반들하게 닦아서 정성스레 보내주신 감 홍시며, 굵은 것만 골라서 부쳐주신 아버지 주먹만 한 감자가 눈에 선하다. 홍시를 입에 넣을 때면 애면글면하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뭉클 전해져 왔었다. 어머니께서 보내 온 감자를 구워도 먹고, 잘게 썰어 반찬으로 졸여서 요리해 먹던 생각이 난다. 자취생활 하던 중 내가 제일 잘하는 요리가 감자볶음이었다. 지금은 그 때 하도 많이 먹어 물려서 보기조차 싫어졌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 사랑만큼 곡진한 사랑이 또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추운 겨울날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잊혀지지 않는다. 감기로 아침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갔었다. 반나절쯤 되었을까. 한 친구가 나에게로 다가와 누가 교실 뒤에서 찾는다고 했다. 어머니였다. 주전자에 녹두죽을 쒀 와서 식을까 봐 품속에 꼬옥 껴안고 계셨다. 지금 같았으면 그 정성을 고마워했겠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 부끄러워 도망치듯 교실로 들어오고 말았다.
교실까지 따라와 한 숟가락이라도 뜨라면서 애원하는 어머니와 숨바꼭질을 하던 기억이 어제 일 같다. 끝내 거절하고 말았지만, 당시의 어머니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꼴 난 수치심에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얼마나 못난 자식이었다는 것을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일론 양말에 검정고무신 차림이다 보니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 동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어머니는 겨울철이면 자식들의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털실로 양말과 장갑을 손수 짜주셨다. 뜬금없이 그 기억이 아슴아슴해 온다.
어느 해 가을 운동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바쁜 일손 다 제쳐두고 자식새끼 재롱이며 달리는 모습을 보러 어머니가 오셨다. 보건체조를 하면서 힐끗힐끗 어머니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눈 맞춤하던 일, 달리기할 때 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손뼉 치며 응원하던 그 광경이 망막에 맺혀온다. 점심때가 되면 기름소금에 장아찌만 넣어 정성들여 싸온 김밥을 맛있게 먹기도 했었다. 햇고구마, 햇땅콩, 풋대추 그리고 한 주 전부터 삭혀 온 감 등 푸짐한 먹을거리가 지금의 뷔페식단과 비길 바가 있으랴. 암소도 제 새끼가 아무리 못 생겨도 제일이듯이, 어머니에게는 또한 내가 최고였었다. 십리 길이 넘는 중학교 통학 때면 동이 트기 전에 새벽밥을 지어 도시락까지 싸주시던 어머니, 삼십 리가 넘는 고등학교 자전거 통학 시절에도 이른 새벽밥을 짓는 것은 당연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우리 집의 업(業)이었다. 육남매 키워가며 이른 새벽부터 들에 나가 소처럼 일을 하고 날이 저물어야 집에 돌아오셨다. 얼마나 일을 하셨으면 손에 지문이 다 지워졌을까. 온종일 모내기를 할 때면 허리가 굽어 곱사등 같았고, 밤이면 ‘아야야!’하고 앓으셨다. 우리 집 재산 목록 1호가 어미 소라면, 가보(家寶) 1호는 당연 우리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우리 집 어미 소는 일도 잘하지만 해마다 새끼를 낳아서 살림을 늘려주었다. 어머니 또한 가족들의 모든 등짐을 지고,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일인 삼역을 도맡아 하신 어머니는 아름다운 사랑을 베풀고도 호강 한번 못 하시고 세상을 뜨신 우리 집의 어미 소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 뿐이랴. 다 키운 생떼 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 힘조차 어찌 있었겠는가.
육이오 직후의 경제사정은 또 얼마나 어려웠던지……. 농사가 흉작인데도 기성회비며 월사금, 수학 여행비는 줄줄이 이어졌다.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 몰래 이웃집에 빌려서 손에 꼭 쥐어주시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귀한 손님이 집에 찾아왔을 때, 밥상 심부름은 나와 동생의 몫이었다. 대체로 손님들은 체면치레로 흰쌀밥이나 반찬을 반만큼은 남겨놓는 것이 상례였다. 동생과 나는 남은 쌀밥과 고기반찬을 서로 차지하려고, 상 물리기가 바쁘게 부엌으로 가져와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곤 했다. 그 기억이 어제 일같이 느껴진다.
정작 당신은 못 먹어도 자식만큼은 흰쌀밥을 배부르게 먹여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머니, 철없던 시절의 그 은혜를 커서 백 분의 일이라도 갚았어야 했건만, 잘해드리지 못한 회한이 가슴을 저려 온다.
고대 그리스의 탄탈로스의 딸 니오베는 테베의 왕 암피온과 결혼을 해서 아들과 딸을 각각 6명씩 낳았다. 당시는 다산이 미덕인 사회였기 때문에 12명의 자식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 자식들 모두 영리하고 똑똑했다. 결국 자식자랑 끝에 신의 분노를 사서 자식을 모두 잃은 어머니는 돌이 되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도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아이고, 그 집 아이들은 공부를 다 잘한다면서요?”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해도 어머니는 “남들도 다 그렇지요 뭐”라며 말머리를 돌리셨다.
팔순을 넘겨, 저세상으로 훌쩍 떠나가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어머니, 당신의 살갑던 사랑을 생각하니 오늘따라 명치가 체한 듯 아파 오는 것은 왜일까.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것을 ‘지독’이라고 한다.
새아기가 손자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사랑도 지금의 손자들에게 그 옛날 어머니의 사랑만큼 지독하게 전해졌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해마다 뜻 깊은 어버이날만 되면, 치아가 하나 덜컥 빠지는 느낌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당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 버린 바람 같은 존재임을 지금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