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가배! 추석! 중추절! 이들 모두를 입속 묵음(黙音)이거나 입 밖 성음(聲音)이거나 연호(連呼)를 하고 나면 그 깊은 정서에 몰입한다. 그 연호 다음에는 추석이라는 우리 민족 최대명절의 의미를 음미하게 되고 여기 더해 그 연호의 여운이 아련히 남아 더욱 추석의 의미를 갖게 한다.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데 어감으로는 좀 다르게 느껴져 그 어원과 유래를 알려고, 늦게 철든 아이 같이 사전을 찾았다.
가배(嘉俳)는 삼국사기에 있는 기록인데, 신라 3대 유리왕(24~57) 때 음력 8월 보름날(한가윗날) 궁정에서 놀던 놀이다. 그 해 음력 7월16일부터 나라 안의 여인들을 모아 놓고 편을 갈라 왕녀들이 한 편씩을 거느리고 밤낮 길쌈을 시켜 한가윗날까지 짠 베를 견주어 진 편에서 음식을 내고 춤과 노래 등 유희(遊戱)를 했다. 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인데 졌다고 탄식하며 회소, 회소!라고 소리 내어 불렀다. 이 행사를 가배, 또는 가배절이라고도 했다는데 가배의 嘉자는 ‘즐거울 가’, 俳자는 ‘광대[戱也]’라고 했으니 글자 그대로를 이해하면 가배의 연원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이와 또 다른 이름 추석은, 신라의 가배로부터 유래해 햅쌀로 송편을 빚어 햇과일로 차례를 지내고 벌초·성묘를 했으며, 한가위 또는 중추절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이는 낱말 풀이일 뿐이지만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추석·한가위·중추절의 여러 이름이 된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한가위는 한자가 없으니 ‘가위’만을 때내어 무슨 뜻이 있나 하고 국어사전을 찾았지만 역시 가위도 ‘음력 8월 보름’이라 돼 있어 다시 역사사전을 봤다. 거긴 한가위의 ‘한’은 다 아는 ‘크다’는 뜻이고 가위는 가배의 음이 변해 생긴 말인데 이를 합쳐 한가위가 됐다 한다. 또 중추절은 훨씬 후대에 와서 중국인들이 쓰는 중추·칠석·월석 등을 보고 편의상 줄여 추석이라고 한 것인 듯하다고 했다. 이후는 더 수식화(修飾化) 하느라 중추가절도 나왔으리라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 여럿 있는 이름들이 고어와 현대어가 함께 있으니 모두가 그 운(韻) 하나만으로만 봐도 한가위는 5천년 우리 민족 정회(情懷)의 표상이며 그 고전적 의미로 우리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도 남는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시구만 봐도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한가위와 추석·중추절의 뜻은 같지만 표피적 느낌은 서로 다르다. 한가위는 5천년을 지켜 내린 고유명절의 정서가 풍기지만 추석, 중추절은 현대적 감각이라 어딘지 모르게 그런 정서도 정감도 느낄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한글’만이 갖는 감성의 친숙함이라고나 할까…?
지금이 농업사회도 아니고, 생활의 양태와 사고의 지향점이 천태만상이라 할 만큼 다양다원화이고 세계도 국경의 의미가 없을 만큼 급속히 변화하는데 그런 고전적 감상(感想)에만 머물 수는 없어 그런지 ‘한가위’는 잘 쓰지도 않는다. 어쩐지 유구히 지켜 내린 민족의 귀중한 정서요 자산인데 그걸 잊어가는 듯해 못내 아쉽다. 더구나 정서적 표현이나 순수와 고결을 요하는 창작 운문에서 그리고 시어에서나 인용되는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깝다.
하지만 추석이 민족 최대의 명절인데 한가위 등 그 이름의 유래도 모르고 지금껏 추석을 쇠었지만 이제는 그 역사성을 알고 맞아야 하니 그 의미는 훨씬 다르다. 다시 말하면 추수감사절 정도로 알았다가 이제는 제대로 알고 지낸다는 큰 의미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말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 해방과 6·25 전후, 그때 맞았던 추석을 추억하지 않을 수 없다. 추석이나 돼야 온 여름내 입었던 등지게 벗어던지고 새 난닝구(런닝셔츠)도 입을 수 있었다. 또 조기대가리와 육류인 돼지고기도 먹고, 꽁보리밥만 먹다가 송편도 먹었으니 열 살 전후의 우리들에게는 그게 추석의 의미였다.
어른들은 햅쌀, 햇과일로 조상님 차례 모시고 나면 집안 대소가가 모여 음식 나눠 먹고, 농사짓느라 서로 바빠 평소 없었던 이웃과의 도타운 정도 나눴던 풍성한 최대의 명절이었는데 이제는 날이면 날마다가 명절이 됐으니 이를 어쩌나? 오늘의 우리들이 누리는 의식주와 어려웠던 지난날과 비교하면 지금이 날마다가 명절이란 말이다.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시구가 나올 정도면 그 다음 말은 이어갈 게 없다.
사실, 지금 우리는 ‘셰프’라는 직종이 각광 받을 만큼 먹거리의 풍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오죽했으면 정부는,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TV프로를 제재해야 한다고 나섰을까. 특히나 ‘한끼줍쇼’는, 끼니를 걱정할 때였으면 아마도 SNS에 말폭탄을 맞을 일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즐거움을 주고 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음을 알게 한다.
내 열댓 살이나 됐을 때의 추석 기억이 살아난다. 옆집 일가 아줌마가 와서 몇 마디 얘기 하다 가려고 할 때 엄마가 ‘송편이나 하나 먹고 가라’고 하니, 집에서 많이 먹었으니 나뒀다 귀할 때 올 테니 꼭 그때 달라고 코믹하게 말했다. 유독 ‘그때…’를 강조했으니 모두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마음만으로는 참으로 풍요로웠던 전래의 명절 풍속이었던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