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가을 풍경은 허수아비가 압권이다.
청잣빛 하늘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지고 고개 숙인 벼이삭이 산들바람에 일렁여도, 허수아비 없는 가을은 팥소 빠진 송편같이 무미하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사람 숫자보다 허수아비가 더 많다.’

이렇게 읊은 시인이 있다. 지난 시절, 얼마나 많은 허수아비들이 동실동실 알곡을 무르익히며 황금빛 가을을 가을답게 어울러 놓았던 것일까.
지난날 내 고향 마을 만추의 풍경이 영락없이 이랬다. 하루가 다르게 가을빛이 짙어지기 시작하면, 그 너른 들녘 새떼가 지나다니는 길목 어귀마다 형형색색의 허수아비들이 다투어 등장하곤 했다. 허수아비보다 더 허수아비 같은 사람들이 세운 허수아비다.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을 몸에 두르고서 침묵하고 선 허수아비들은 가으내 무슨 상념에 그리도 골똘했었던 것일까. 저 멀리 어느 한 지점에 하염없이 눈을 준 채 왼 종일토록 옷자락만 하늬바람에 펄럭이고 있던 허수아비, 고뇌에 잠긴 어느 철인哲人 같기도 하고 진여眞如에의 깨달음을 꿈꾸는 묵중한 수도승修道僧 같기도 했다. 행색은 비록 초라할망정 정신만은 가을 강물처럼 맑아 보였다.
그랬던 허수아비를 바라보는 마음이 오늘따라 그렇게 넉넉하지만은 않음은, 어쩐지 관객 없는 무대 위에 선 각설이의 모습으로 비쳐 옴은 대관절 무슨 까닭인가. 세상이 변하면서 허수아비의 시절도 흐르는 세월과 함께 떠내려가 버렸다.
어쩌다 시골마을 동구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그리워진다. 고향을 지키던 이들이 살길을 찾아 하나 둘 대처大處로, 대처로 떠나가 버린 탓이다. 한 살이라도 나이 더 들어 힘에 부치기 전에, 젊은 날의 꿈이 그나마 쥐 꼬랑지만큼이라도 붙어 있을 때 서둘러야 한다며 너도나도 앞 다투어 짐을 쌌다. 돈벌이라는 명목이, 아니면 자식 교육이라는 구실이 풀냄새 밴 옷자락에 따라붙었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를 허수아비들이 대신 지키고 서 있다. 이래서 시인은 아마도 사람보다 허수아비의 수효가 더 많다고 노래했었는가 보다. 이즈음의 고향마을은 텅 빈 강당처럼 적요寂寥하고 스산하다.
이따금 허수아비 생각을 할 때면 불현듯 고향집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허수아비를 벗 삼아 팔십 평생을 묵묵히 땅 하나만 일구며 살아오신 아버지, 스물 몇 해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홀로 시골집을 지키고 계신 아버지는 당신 자신이 그만 외로운 허수아비가 되셨다.
이것이 어찌 내 아버지뿐이겠는가. 오늘도 거기 남아서 말없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허수아비처럼 허허롭게 척박한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은 아닐는지. 그 허수아비 아닌 허수아비들이 이 순간 가슴 한구석에 애잔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아! 가엾은 고향마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