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설 새해를 맞았다. 설이라는 말의 어원은 제대로 못 먹어서 ‘섧다’가 ‘설’로 변했다는 말도 있고, ‘낯설다’는 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등의 설(說)이 있다. 설을 맞고 보니 내 유소년 시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배고팠던 그 시절 평소에는 먹어보지도 못했던 떡국이 1순위요 그 다음이 우리 전래의 과자인 강정 부스러기였으니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 제일 컸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강정은 좀 나은 집은 찹쌀로 만들지만 대다수는 멥쌀로 만듦이 일반적이었으며 좀 더 격상된 이름을 붙여 유밀과(油蜜菓)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꿀을 썼으니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지금은 아마도 그런 민중의 숨결이 서린 정통의 이름은 잘 쓰지도 않으니 언젠가는 국어사전에서나 그 명맥을 이어가지 않을까 한다. 하긴 지금 나이 드신 어른들은 유밀과보다는 ‘유밀개’로, 더 막 쓰는 말로는 ‘어리’가 더 친숙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 다음이 설빔이었다. 설빔이라고 해봐야 평상시에 솜 놓은 무명 바지저고리만 입다가 남방이나 점퍼라는 말도 없을 때 그저 학생복 같은 옷을 시장가서 사 입을 수 있으면 그것이 최상이었고, 거기다 새 운동화에다 새 양말이라도 신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사실 설빔이라는 말도 당시에는 몰랐고 그냥 ‘설치레’라고 했다. 새삼 지금 들으니 표준말 설치레보다는 사투리‘설치리’가 더 정겹다. 당시의 소득 수준이나 생활상을 오늘의 경제규모와 비교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 구태여 비교한다면 모두가 넘쳐나 날이면 날마다가 설인 오늘에서 어렵던 당시와 비교한다는 것은 부질없다는 말이다.
피폐했던 일제시대를 지나 광복과 6.25를 거치며 부족한 것이 어디 먹거리뿐이었을까만 입을거리도 부족하여 오늘에 비하면 ‘굶주리고 헐벗었다’고함이 더 정확하리라. 그럴 때에 그나마도 먹지 못했던 것 먹어보고 재수 좋으면 입을 것도 생기기까지 했으니 추석과 설은 1년 중에는 제일 큰 명절이기에 충분했다.
고난의 세월 보릿고개도 있었고 온 여름내 꽁보리밥만 먹다가 추석엔 송편도 먹었으니 오죽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혜안이 빛을 발했을까.
설날 새아침의 세배도 중요한 우리 세시풍속중의 하나이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형제자매 다 모여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고 첫 떡국을 올린다. 엄부자모이듯 전통 유교사회에서 아버지는 늘 자애보다는 근엄함이 일상이었으니 세배를 드리는 그날 아침이면 더욱 그랬던 아버지의 존영(尊影)이 아직도 선명히도 떠오른다.
이어 당내친(堂內親.10촌 이내의 친척) 집안의 세배가 시작되고 끝나면 차례를 지내는데 그 순서도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제일 맏집부터 시작한다. 음복 순서도 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이다.
조상에게 올리는 차례도 정성을 다하지만 내놓는 음식상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집 무슨 음식이 제일 맛이 있고 그 집 특유의 메뉴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었다.
차례가 끝나면 동네 어른들 세배에 나선다. 딱히 정해진 것은 없어도 대강 환갑을 지난 어른들이 그 대상이었으며 평소 좀 소원했거나 별다르게 지냈던 사이도 꼭 찾아 인사를 차렸다. 더욱이 백여 호 일촌이 다 족친이었으니 모두가 집안 어른일 수밖에 없었다.
세배를 하면 답례로 어김없이 유밀과가 나오고 덕담도 빼놓지 않는다. 좋은 꿈 꿨느냐가 주류이고 아들 귀한 집엔 ‘금년엔 생남해야지’라고 하고 농사 얘기 하는 것이 거의 정해 논 순서였다.
이러는 사이 친지애도 생기고 친지애는 곧 마을 공동체로 옮겨져 사회 발전의 구심점으로 발전하는 최소한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순후한 우리들 인정의 원천이었으며, 그래서 향약도 생기고 농번기에는 협동의 모태인 두레가 성행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런 세배 행사는 합동으로 도배례(都拜禮.한꺼번에 절함)를 300여 년이나 이어오는 대단한 문중이 있다고 한다.
그랬던 시대가 농업사회의 전형이었는데 오늘의 다원화된 산업사회에서 차츰 사라져가는 고유한 전래의 미풍양속이 우선은 아쉽기만 하다. 역사 발전은 변화를 전제로 하지만 너무 많이 변해버린 세태에서 느낌의 일단을 적어보는 것이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그 많은 변화의 길목들을 어찌 다 언급할 수야 있을까만 아주 극미한 세시풍속의 일면을 회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