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임 자리에서 나온 제안이다. 얘기인즉슨 한 차례 자식 자랑을 할 때마다 일만 원씩 내어놓기로 약조를 하자는 것이다.
물론 재미 삼아 그리 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한편으론 분별없이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풍조에 대한 경책의 의미도 은연중 깔려 있지 않나 싶다. 항시 느끼는 바이지만, 눈치코치 없이 잔뜩 자랑을 늘어놓아 상대방의 기분을 불편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는 자신은 즐거울지 모르나 들어주는 사람으로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이 못 된다. 그런 사람 앞에서 “아, 그래! 그래!” 하며 마음에 없는 말로 맞장구쳐 주는 일이야말로 정말 고역 중의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예의 그 제안은 어쩌면 하나의 벌칙 규정인 셈이다.
한데도 서로들 돈 내놓을 기회를 얻지 못해서 안달이라니 참 우스우면서도 씁쓸하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 속담이 공연히 생겨났을 리 없다. 자식 자랑하고픈 마음이야 그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사람의 부모 된 자로서 으레 지니게 되는 본능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같은 자랑이라도 손자 자랑은 이와는 사뭇 경우가 다른 성싶다. 내놓고 자식 자랑 일삼는 이를 만나면 ‘너는 어째 그런 게 다 있더냐.’ 싶은 고까움으로 구역질이 날 때가 다반사이지만, 손자를 두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늘어놓아도 대개 사람들의 눈총을 비켜갈 수가 있다. 아니, 눈총은커녕 오히려 은근한 부러움의 시선을 받게까지 되니 참 묘한 일이다.
대체 무슨 까닭에서일까. 손자란 벌써 한 다리 건넌 개체여서 그럴까. 아니면 사위 사랑은 장모라 하듯이, 손자 사랑은 조부모란 것을 사회적 통념으로 인정해 주어서 일까. 그도 아니라면 은근히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치장하는 장신구 같은 존재가 자식임에 비해, 아무런 전제조건도 이해관계도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 손자여서인 까닭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늙마의 외로움을 측은히 여겨 주는 세상 사람들의 연민 어린 마음 때문일까.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보아도 도무지 뾰족한 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손자를 얻어 처음으로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란 호칭을 듣게 되면, 기쁨과 비애가 뒤섞인 착잡한 기분에 젖어든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편으로는 ‘나도 이제 손자를 보았으니 어지간히 살 만큼 살았구나.’ 하는 허망스런 심정이 드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장차 이승을 떠나더라도 꼭 나를 닮은, 내 피가 흐르는 생명체가 나를 대신해서 계속 삶을 이어가리라는 생각에 한없는 위안의 마음을 갖게도 된다는 것이다.
노환으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단말마의 고통을 호소하는 병인病人이, 숨 줄이 끊어지기 직전에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청하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망은, 애써 모은 재물에 대한 간수나 성대한 장례식이나 풍광 좋은 천년집 따위에 대한 당부가 아니다. 그것은 십중팔구 손자를 불러 달라는, 소박하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바람이다.
예전엔 굳이 왜 그럴까, 속 깊이 의아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뒷날 그 연유를 알게 되고부터, 임종을 한다는 것이 그리도 마땅한 자손으로서의 도리임을 절절히 깨달았다. 어디서 무엇이 돼 다시 만날지 모를 이승에서의 영원한 결별 앞에서 이것이 얼마나 지중至重한 일인가.
손자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그 따스한 손길을 어루만지면서 망자亡者는 마음 편히 저승길을 갈 수 있으리라. 그래서 손자는, 흔히 하는 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누구에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현상적으로 살피면 한 생명 한 생명이 죽음이라는 탈피의 과정을 겪음으로써 덧없이 이울고 마는 것이겠지만, 한편 생각을 달리해 보면 그것은 결코 한동안 흐르다가 끊기고 마는 개울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란 면면히 이어지는 강물과도 같은 것.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또 그 아들을 낳고……,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간단없는 흐름이 우리네 인생사인가 한다. 이러한 사실이 죽음에의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존재자들에게 더없는 위안을 안겨다 준다. 까닭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를 귀엽게 여기고 사랑스러워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한 생명현상이 아닐까 싶다.
핏줄에 이끌리는 조손간의 친밀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손자가 겉껍데기로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아직 익히지 아니한 것이, 이럴 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겉모습으로 모든 가치를 셈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가 일찌감치 알아 버렸다면, 호호백발에다 살갗마저 쭈글쭈글하고 거무데데한 제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는 얼씬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 하는 말이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새 생명이 소멸해 가는 생명과 어우러지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흐뭇한 광경이다. 이런 장면에서 나는 우리들 생명의 영속성을 굳게굳게 믿고 싶어진다. 그러기에 손자를 생산해 당신의 무릎 위에다 앉혀 드린다는 것, 이것은 이울어 가는 생명에게 베풀 수 있는 손아랫사람으로서의 최대의 효도가 아닌가 한다.
훗날에 가서 마침내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될 때에도 이 생각이 변치 않을지 어떨지는 의문이다. 세월 따라 바뀌고 달라지는 것이 갈대 같은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으로선 속이지 못할 솔직한 심정인 것을 어쩌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