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처서도 지났다. 이 절기를 고비로 이제 한더위는 완전히 꺾인 듯싶다. 그동안 바짝 조이고 있던 마음의 끈을 조금 풀어 놓을 만하다.
이맘때쯤이면 낮과 밤의 기온차가 확연해진다. 낮이 아직 여름의 맛이라면 밤은 이미 가을의 맛이다. 매미와 귀뚜라미가 낮밤을 섞바꾸어 가며 우는 시절도 바로 이즈음이다. 매미 울음이 여름 소리의 대명사였다면, 귀뚜라미 울음은 가을 소리의 표상이라고나 할까. 사람의 간사스러운 마음 때문이리라, 해마다 겪게 되는 여름이지만 겪을 때마다 그 해 여름이 가장 힘에 겨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랬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쳇말로 푹푹 찌는 듯 가열한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여름내 연신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 계절이 어서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비는 심정이 고래 아니면 굴뚝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침저녁으로 제법 삽상한 선들바람이 옷자락 소매 속으로 기어들기 시작하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 뜨거웠던 여름날이 되레 그리워진다. 이는 또 어인 변덕이런가. 바늘 끝처럼 따끔따끔하던 햇살이 솜이불같이 보송보송한 볕뉘로 바뀌면서 가을은 시나브로 깊어 가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길고도 지루하게 이어질 겨울 석 달의 채비를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름이 꼭 시련으로만 표상되는 것은 아니다. 가도 가도 모래언덕밖에 없는 사막의 머나먼 여정에도 오아시스 같은 기쁨 하나씩은 만날 수 있지 않는가. 흔히 가을을 일러 풍요의 계절이라고들 하지만, 여름 또한 가을 못잖게 풍성한 시절이다. 벌판 가득 펼쳐진, 눈이 부시게 푸르른 초목들하며, 펄펄 달구어진 대지 위에 예고 없이 쏟아지는 한 줄기 소낙비하며, 수박, 참외, 복숭아, 포도 같은 가지가지의 제철 과일하며, 이런 것들을 마음껏 맛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음은 여름만이 지니는 묘미 아닌가. 어쩌면 이 같은 즐거움 덕분에 여름을 나기가 한결 수월한지도 모르겠다.
이제 얼마 아니 있으면 흰 이슬이 내린다는 절후인 백로白露이다. 이런 무렵이면, “고독은 욕되지 않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이라고 노래한 청마 시인의 시구가 생각난다. 세상 사람들이 너도나도 산그늘을 찾고 물놀이를 떠나느라 부산을 떨 때, 뙤약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렸을 농부에게는 풍요한 결실이 가슴을 뿌듯하게 채워 줄 것이고, 도서관 구석진 자리에 붙박여 머리띠 질끈 동이고 책과 씨름했을 수험생에게는 합격의 그 날에 대한 기대가 내밀한 미소를 짓게 하리라.
사실 그들이 값진 영광을 얻어 내기까지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으로 얼마나 힘에 겨웠을 것인가. 당장이라도 바깥세상으로 뛰쳐나가 마음껏 거리를 쏘다니고 싶은 심정이야 어디 하루에도 몇 차례였을라고. 그럴 때마다 이 겨운 도전의 시간들을 참고 견디고 이겨내자며 이를 악물고 또 악물었으리라. 그렇게 묵묵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그들 앞에는 인고의 다디단 열매가 소리 없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정녕 가을은, 시련의 계절인 여름이 있기에 그 존재 가치가 빛이 나는 법이 아닐까. 이렇듯 여름은, 우리에게 인내와 기다림의 소중한 값어치를 깨닫게 하려는 조물주의 속 깊은 배려로 마련된 계절이지 싶다. 그 절대의 의미를 해마다 이 시절을 맞이하고 보낼 적마다 가르침 받곤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