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양편에 아름드리 노송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수천 마리의 용이 일시에 하늘로 오르는 듯 구불텅구불텅 비틀어지고 휘감긴 형상으로 장관을 연출해 낸다.
하나같이 거북등 껍질을 하고서 이쪽저쪽의 우듬지와 우듬지가 서로서로 이마를 맞대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이루었다. 자연이 빚어낸 경외스러운 광경에서 세월의 깊이가 느껴져 온다. 근 서른 해 만에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다시 찾은 길이다. ‘靈鷲山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 옆에 마련된 주차장에다 차를 세웠다. 구두를 벗어 운동화로 갈아 신고 맥고모자를 눌러썼다. 배낭도 메었다. 단장까지 챙겨든다. 일상에 지친 머리도 식힐 겸 쉬엄쉬엄 걸으면서 어쭙잖게 선승들의 만행萬行을 흉내라도 내어 볼 심산이다.
산문으로 들어서자 여울을 사이에 두고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왼편의 찻길을 곁눈질하며 오른편에 난 산책길로 접어든다. 차를 타고 가든 다리 힘을 빌리든 조금 빠르고 더딘 차이만 있을 뿐 불국정토에 다다르는 것이야 결국 매일반 아닌가. 다만, 부처님은 둘 가운데 어떤 걸음으로 당신을 친견하러 오라고 하실는지 그것이 궁금해진다. 몇 발자국을 떼어놓으니 장승처럼 선 입간판 하나가 순례객을 맞이한다. ‘舞風寒松路’ 바람에 춤추는 소나무길, 언제 누가 지어서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되 그는 필시 풍류를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리라.
무풍한송로 무풍한송로 무풍한송로, 입 안에 넣고서 되풀이 궁굴려 본다. 마음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는 내 기분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동남풍에 몸을 맡긴 소나무들이 설렁설렁 몸을 흔들어대며 춤사위를 펼친다. 
순간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칭에 걸맞게 어쩌면 이리도 많은 소나무가 여기 이처럼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더란 말인가.
산문에서부터 일주문이 자리한 곳까지 자그마치 오 리도 넘어 될 성싶은 산책길이 온통 소나무 일색이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이 거대한 소나무 군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었다. 소나무야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서 이렇게 자라고 있었을 터이건만, 내 시선은 그 존재에 가 닿을 만큼 제대로 성숙되지 못했던 것 같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관심사에 있는 것만 보고 듣고 한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가 보다. 한두 그루였으면 혹여 놓치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줄잡아 수천 그루, 그것도 아름드리 노송들임에도 그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니……. 비단 소나무뿐이 아니었다. 절집으로 들어섰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영각影閣 앞에 심어진 삼백오십 년 묵은 자장매慈藏梅며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 옆의 백동백나무, 그리고 다시 그 옆으로 장골 허벅지 굵기만 한 금목서가 떡하니 자태를 뽐내고 있지 않은가. 이 나무들이 여기 이렇게 심어져 있었다니…….
다른 어느 절집에서도 만나지 못할 희귀한 노목들로 해 천년고찰의 격조가 한층 높아져 보인다. 다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생을 이어왔을 것이고 보면, 처음 갔을 때도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당시 내 눈은 이 나무들의 존재를 전혀 담아내지 못했었다. 다만 기억 속에 각인된 것이라고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적멸보궁과 몇몇 전각뿐이다. 그 때는 왜 보아도 보이지 않았을까.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면서 크고 굳세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고 여리고 소박한 것에 관심이 간다. 인공물보다는 자연물에 시선이 머문다. 사람을 위압하는 미끈한 건축물에서는 더 이상 감동이 돼 오지 않는다. 앙증맞고 연약한 꽃과 풀, 오래된 나무 같은 것들이 왠지 정겹게 느껴진다. 꽃나무들을 향한 호감도도 점차로 달라지는 것 같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에는 사람의 눈을 호리는 원색 계열의 꽃이 좋았다. 혼을 빨아들일 것 같은 그 강렬함에 매혹되곤 했다. 그랬던 것이, 머리에 서리꽃이 늘어가면서는 은은한 빛깔의 꽃이 더 좋아진다.
여기서 다가 아니다. 옷맵시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남들의 눈을 의식한 튀는 디자인의 옷을 선호했다. 어쩐지 그런 차림이 멋스러워 보이고 세련되게 느껴졌었다. 그랬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는 수수한 입성이 훨씬 우아하고 품위 있게 다가온다. 사람에겐들 뭐 다를 것인가.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에는 미끈하게 생긴 얼굴에 마음이 끌렸었다. 중년을 넘기고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은, 시간을 비켜간 듯 희번드르르한 얼굴보다는 세월의 풍상이 묻어나는 주름진 얼굴에 보다 정감이 간다.
세상사를 바라보는 눈이 세월 따라 정반대로 바뀐 것은 대체 무슨 조화에서인지 모르겠다. 나이를 헛먹은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먹어 온 것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