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겨우내 옴츠리고 있다가 만물이 생동하는 새봄이 오면 나는 바쁘다. 화분에 꽃을 심기보다 고추 상추 등을 심는 것이 적어도 내게는 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씨앗이 먼저지만 몇 모종 서너 포기만 필요해서 정릉천을 뒤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그 드센 잡초 속에서 가냘프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려는 생명들이 가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걸 제대로 살게 하는 것이 ‘박애’도 ‘생명 중시’도 돼 이건 ‘도랑 치고 가재 잡고’였다. 어쩌면 그게 내 취미이고 거기 더 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1년도 아닌 대여섯 달이나 살다갈 ‘풀의 일생’도 생명은 생명이어서 버려진 ‘고아’를 찾는 심정으로 찾았지만 쉽게 보이지 않았다. 수년 전 정릉천 하천 정비를 하기 전에는 각종 씨앗이나 다듬다 남은 야채 찌꺼기를 뿌리와 함께 아무렇게나 버렸기로 그게 다시 살아나 쉽게 눈에 띄었지만 정비 후는 좀체 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생활폐수 버리는 곳을 찾으면 용케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느 날 달랑 고추 한 포기를 발견한 것이다. 그럴 땐 그야말로 ‘심봤다!’였다.
처음 옮겨 심으면 2,3일 간은 맥없이 짜부러졌다가 4,5일이 지나면서 서서히 살아난다. 그사이 비나 좀 오면 때를 만난 듯 금방 살아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따가운 봄볕에 시들시들, 살겠다고 악전고투하는 것을 보면 안쓰러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 역경을 이기고 튼실히 뿌리박고 살아나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보는 것이 내 ‘자그만 희열’이었다.
다시 상추 들깨를 찾아 정릉천변을 나섰으나 더는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남의 집 앞을 기웃거려야 했다. 그 잘난(?) 박애, 생명 중시가 내 이기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무데나 있어도 살 만큼 살다 천수를 다할 텐데 구태여 절취(竊取)라는 범죄를 저지르며까지 내 취미에 충실 하자니 본래의 취의가 무색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도 생각을 바꿀 수 없어 낮에 정찰(?)을 했다가 밤에 인적이 뜸해지면 가서 한두 포기 잽싸게 뽑아왔다.
그렇다고 마구 뽑는 게 아니라 그들끼리 생존 경쟁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나 발육 부전(發育不全)의 것만 택한다. 만일 발각돼도 큰 곤욕을 치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 놓곤 누가 볼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숨에 집으로 온다. 그렇게 해서 고추 들깨와 함께, 덩굴 식물인 참외와 여주(박과에 속하는 1년생 만초·蔓草)도 이웃으로부터 이식용으로 받아 내 식구가 된 것이다.
완전이 뿌리 내려 살기까지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물이 제 스스로 바로 서지 못하고 다른 물체를 감으면서 살아가는 이른바 칡 같은 기생목(寄生木)이 있는가 하면, 여주 참외 같은 꼭 헛발(식물학에서 부르는 이름인지는 모르겠다)이 나와 다른 물체를 휘감아 오르며 사는 전요(纏繞)식물도 있다. 그 전요식물의 감는 형상이 꼭 스프링 같아, 초교시절 들었던 동요 ‘바아알, 발…’이 생각나게 한다.
곧 감을 대상을 찾게 되겠구나! 하고 있는데 돌아서 다시 보면 어느 사이 감아 놓곤 날 보라는 듯 살랑살랑 춤만 춘다. 그 실오라기 같은 헛발이 용케도 살아갈 방도를 찾는 그게 바로 ‘생명의 신비’였다. 
애완동물이 인간의 반려자가 된지 오래이다. 식물도 이와 다르지 않아 내 반려자가 되기까지의 너의 기이한 ‘생사의 변전(變轉)’을 생각하게 했다. 내 친생자도 아니고 잘 살고 있는 너를 ‘보쌈(조선시대 권세 있는 계층이 청상·靑孀을 보에 싸서 납치하는 행위)’해서 내 반려를 삼았으니 말이다.
친생자가 아니면 그럼 양자인가? 친생자건 양자건 무슨 상관인가. 비록 야만적(?) 절취는 했지만 어디서든, 누구의 반려가 되든 잘 살아 내게 즐거움만 주라는 마음만은 변치 않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친·양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옥상도 아니고 반려들이 마음 놓고 한껏 삶을 누려갈 수 없는 협소한 공간이니 그들의 특성인 향일성(向日性)으로 키만 멀쑥 크고 있었다.
자화수정이라고 알고 있는 고추, 도마도도 꽃도 피고 노랑나비 한 마리도 날아왔지만 고대하는 열매는 쉬 맺히지 않는다. 이를 어쩌나!
인간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들인다. 나는 그것도 아니고 그 잘난 생명 중시라는 미명으로 양자를 보쌈을 해가며 들였지만 끝내 불임이 될지도 모르니 이 무슨 꼴인가! 한 마디로 내 보쌈 작전은 실패였다.
하긴 우리 젊은이들도 비혼족이 늘어나고 있고 결혼을 해도 2세는 보지 않겠다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시류가 아는 듯 모르는 듯 우리 곁에 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은 서글픈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자꾸 해서는 안 될 비유를 상상으로 하게 됨을 어쩌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의적 ‘행복추구권’이지만 하찮은 풀 나부랭이는 타의적 불임이니 그게 태생적으로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다만, 취미라는 이름의 보쌈이 원죄라면 원죄이다. 어쨌거나 그것이 가벼워지려면, 성공한 양자·보쌈이 되려면 맘껏 자랐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