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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0  10: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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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부문 왜곡(歪曲)되고 특정 문중에 경도돼 편집되었던 종래 고령지역의 인물사(人物史)를 재평가해 오직 객관적인 기준과 참고문헌(參考文獻)에 의해 고증된 인물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고령지역 인물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향토사의 귀감이 되는 고대부터 고려와 조선, 근·현대시대의 내용을 알리고자 한다. 
 

고령청년회(高靈靑年會)
1920년 7월 3일 유우식(兪佑植)·이상봉(李相鳳)·이정근(李正根)·김종기(金鍾基) 등의 발기로 창립되었으며, 당시 임원으로는 회장 김구현(金龜鉉), 부회장 박지화(朴芝華), 총무 이정근 등 고령지역의 유지와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1923년 청년회가 침체하는 상황에서 청년운동의 방향이 문화계몽운동에서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고령청년회도 능동적인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25년 집행 위원제로 체제를 개편해 사회주의적 청년단체로 전환했는데, 10월 14일 개최된 제4회 집행위원회에서 집행 위원장 유용목(兪龍穆), 서무부 유봉완(兪鳳完)·이정규(李正圭)·유일(兪逸), 교육부 정이환(鄭二桓)·이원용(李元龍)·곽수빈(郭守斌), 조사부 강운(姜芸)·김성문(金星汶)·이종국(李鍾國), 사회부 김종기·정운휘(鄭雲徽)·이경호(李暻浩), 체육부 이상준(李尙埈)·송삼룡(宋三龍)·박장오(朴章悟), 소년부 정춘택(鄭春澤)·백남주(白南柱), 검사위원 이정근·유우식·이상봉, 지방 위원 이정욱(李正郁), 정재옥(鄭在玉) 등으로 임원진이 개편 됐다.
한편, 각 면 단위로 지회가 설치되었으며, 당시 활발하게 활동한 지회는 고령청년회 개포지회[1925. 3. 5]·안림지회[1925. 12. 27]·다산지회[1926. 1. 26] 등이 었다.
이후 이들 지회는 개포청년회[1926. 3. 2]·안림청년회[1926. 1. 4]·다산청년회[1926. 3. 5]로 개편되었으며, 1927년 4월에는 덕곡청년회가 창립되기도 한다. 그리고 1926년 3월 27일 고령지역 각 청년운동단체를 아우르는 고령청년연맹이 결성되면서 그 하부 조직으로 재편성됐다.
-주요사업과 업무로는 노동야학을 통한 문맹퇴치 운동,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의 문화 운동과 토론회, 강연회 등의 개최를 통해 실력양성운동과 관련된 사업과 업무를 수행했다.
참고문헌-일제침략하한국 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풀빛), 한국독립운동사사전(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출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신간회 고령지회(新幹會 高靈支會)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 합착체로서 신간회가 결성된 뒤 경북지방에서는 같은 해 6월부터 1929년 7월까지 김천지회를 시작으로 총 21개의 기회가 결성되었으며, 회원 3,400여 명이 가입해 활동했다.
신간지 고령지회도 그중 하나였다. 1927년 8월 25일 신간회 고령지회의 조직을 위한 준비모임이 고령청년회회원 변희용(卞熙用)·신철휴(申喆休)·최영돈(崔永敦)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고령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으며, 가입회원은 52명이었다.
같은 해 9월 12일 오후 3시 고령청년회관에서 신철휴의 개회선언으로 추가로 가입한 13명을 포함한 65명의 회원 중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대회가 개최됐다.
임시 의장 박계삼(朴桂三), 기록 서기 유영식(兪永植), 사찰 김시병(金始炳)을 선출하고 신간회 본부에서 파견된 박동완(朴東完)의 축사에 이어 임원을 선출했다. 선출된 임원은 구체적으로 회장 변희용, 부회장 박계삼, 서무부 총무 간사 김종기·신철휴, 조사연구부 정치문화부 유우식·배수동, 재무부 정운목·이병춘·이상봉·김욱배, 선전부 김삼도·이상용, 간사 김시병·정운목·박장오·최영돈·유봉완·김재순 등이었다. 1929년 8월 10일 임원을 개선하고 집행위원장으로 신철휴·이상봉·변희용·이병춘·김종기·유우식·유용목·이장오·박계삼·배수동·이균영, 후보로 이무삼·김재순·김원현·김성문, 검사위원으로 이경호·김욱배 등을 선출했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 본부가 해산된 뒤 신간회 고령지회도 해산됐다.
-신간회 고령지회는 신간회 본부의 활동방향에 따라 고령청년회와 연계를 맺으면서 사회활동과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설립됐다.
참고문헌-고령문화사대계(1-역사편), 조선일보(1927, 1929), 중외일보(1928, 1929)
출저-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고령군 국채보상회(高靈郡 國債報償會)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합심해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원을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국권회복운동으로 1907년 2월에 대구에서 공식화됐다.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고령유생 이규신(李奎紳)·이인재(李寅梓)·이상희(李相犧) 등이 발기했다. 회의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연설에 이어 이규신이 100원을 먼저 의연하자 군민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순식간에 1,000여 원이 수일 만에 수천 원이 모였다.
국채보상을 위해 고령지역에서 의연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직된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고령군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을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참고문헌-이상근(국채보상운동에 관한연구), 권대웅(한말 한주학파의 계몽운동), 대한매일신보(1907. 4. 21)
출저-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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