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처럼 나선 나들잇길이다. 어디를 가겠다는 방향도,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없었다. 이날따라 즐겨 찾는 산책로를 마다하고 어쩐지 문화예술회관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어졌다.
  헤아려 보니, 그것은 하나의 귀한 인연을 만나려고 해서였는가 보다. 뜻밖에도 이곳 이층의 대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원응元應 큰스님의 ‘화엄경 금니사경 회향전華嚴經金泥寫經回向展’을 감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스님은 지리산 자락 서암정사西庵精舍의 조실로 주석하면서 십 수년의 시간을 오로지 이 화엄경 금니사경에 매달렸다고 했다.
온통 검정 일색의 바탕에다 샛노란 금가루로 장식을 해 놓았다. 무려 육십여 만 자에 달하는 장엄한 화엄경의 말씀이, 스님의 자비로운 손끝을 통해 금빛 찬란한 옷을 입고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깨알같이 촘촘히 박힌 한 자 한 자의 글씨, 하나같이 크기며 모양새며 필선筆線이 자로 잰 듯이 반듯하다. 사람이 한 작업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이 벅찬 감동을 전하기에는 역부족일 듯싶다. 필생의 원력을 세우지 않고서는 결코 해낼 수 없을 대역사大役事 앞에 절로 옷깃이 여미어진다. 어쩌면 큰스님은 화엄경 한 편을 사경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불보살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 줄로 죽 펼쳐 놓으면 총 길이가 일천 삼백여 미터에 달하는 역작力作이다. 이 불후의 불사佛事를 위해 사용된 금이 무게로 쳐서 자그마치 사 톤, 종이 매수 감지* 이천여 장, 닳아 없어진 붓만도 무려 예순 자루가 넘는다고 한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스님은 각고의 정진 끝에 마침내 회향해 내신 것이다.
고희를 넘긴 연치에도 불구하고 하루 서너 시간씩 작업에 몰두하느라 한때 실명의 위기까지 겪으며 한 자 한 자 혼을 쏟아 이룩한 땀의 결정結晶, 이것이 실로 빛나는 수행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절 부근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달래고 민족 화합과 국운 융창을 기원하기 위해 처음 이 불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말이 쉬워 그렇지, 그 일이 어디 아무나 해낼 수 있는 만만한 작업일 것인가. 뼈를 깎고 피를 쏟는 고행의 연속, 큰스님의 무량한 원력이 마침내 천추에 길이 빛날 위업으로 결실을 맺어, 오늘 내가 이처럼 뜻깊은 만남의 인연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리라.
기나긴 역사의 흐름으로 따져 보면 한 인간에게 허여된 이승에서의 생존기간이란 잠시 이슬방울이 맺혔다 스러지고 번개가 번쩍 광채를 발하며 사라지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이 무상한 찰나의 삶에서 영원히 꺼지지 아니할 찬연한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값진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몇 해 전, 경북 예천의 천년고찰인 용문사龍門寺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주지 스님으로부터 그곳 대장전의 윤장대輪藏臺를 한 바퀴 돌리기만 하면 수만 권의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수행이 된다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오늘 다시금 생각난다. 원응 큰스님의 이 화엄경 금니사경을 한 번 친견하기만 하면 그와 맞먹을 만한 공덕이 생긴다고 하니, 그 참 값어치를 가히 헤아릴 만하다. 이로 보면, 스님의 화엄경 금니사경 불사야말로 진여에의 가르침이며 호국의 성전聖典이다. 아니, 영혼의 법음法音이다.
이 귀한 불사를 친견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내 삶에서 어찌 값진 인연이 아닐 수 있으랴. 마음의 눈으로 살피면 처처에 인연 아닌 일이 없는 것을…….
*감지: 물들인 닥종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