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한글과 한자’ 얘기 하다 우리들 어문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날이면 날마다 외래어와 영문 이니셜의 신조어가 쏟아지는 어문환경에서 그나마 잡문이라도 쓰려니 시대 흐름에서 낙오하는 것 같다고 실토한 바 있다.
오늘의 이런 세태에서 외래어를 쓰지 않는 소재나 문맥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단조로워 ‘위축’ 같은 것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현대의 생활이 ‘미디어’가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신문 등 활자 미디어, 전화기 등 전자 미디어의 범람 속에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거리에 나서면 그 많은 입간판도 외래어가 태반이고 강남의 번화가는 아예 영문 그대로 쓰는 간판이 있는가 하면, J`adore(쟈도르)라는 ‘프랑스 전통 디져트’라는 간판도 있다. 거기다 ‘바이어로직스’, ‘셀트리온헬스케어’라는 회사명 간판이 있는가 하면, ‘와이즈노벨리아’라는 영어인지 불어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아파트 이름도 있다. 왜 그렇게 짓느냐고 하니까 시어머니 찾아오기 어렵게 하려고 한다는 우스개도 나오는, 오늘의 외래어 홍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다. 그렇다고 시대 변화에 따른 외래어 사용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눈 깜박하는 사이 변화하는 시대에서 낙후하지 않으려니 그 적응이 어렵다는 말이다.
입간판 얘기 하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20년도 더 지난 당시 대폿집(막걸리집)이 골목마다 있었는데 퇴근길에 부담 없이 간단히 한 잔 하라는 ‘간따나게’라는 옥호(屋號)가 있었고, 어느 주점은 프랑스 파리 관광지 몽마르트르를 패러디한 ‘몽마르지’가 있는가 하면, 불과 10여m 떨어진 곳은 ‘목마르제’를 붙인 곳도 있었다. 세 업소 모두가 샐러리맨을 유혹(?)하는 기발함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88올림픽을 유치해 놓고 온 나라가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단군 이래 최대 행사라는 자부심으로 전 국민이 나섰다. 먼저,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우리 전통 음식인 ‘보신탕’을 서구인들은 진작부터 ‘혐오식품’이라 힐난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지구촌의 큰 잔치를 앞두고는 미개인 운운하며 대회 불참도 불사하겠다는 극단론자도 있었다.
이에 정부는 좀 강압을 해서라도 대회 기간만이라도 업소를 제재하겠다고 했다. 더러는 전업을 한 예도 있었고, 하루아침에 생업을 포기할 수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영양탕·보신탕 등으로 간판만을 바꿔 다는, ‘눈 감고 아웅’하는 업소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는 따로 있었다. 간판 ‘보’자와 ‘탕’자 사이에 고무신 한 짝을 그려 넣은 간판이 걸렸기 때문이다.
궁하면 통한다[窮則通]는 바로 그것이었다. 자구책 치고는 참 기막힌 재치였다. 지금도 간간이 생각나면 속으로 웃는다.           
그 한참 후의 일이다. 어느 날 부동산 중개업소 앞을 지나게 됐는데 창문에 오랜만에 보는 붓글씨로 매매, 전세, 월세 다음에 ‘월농넘’이라 씌어 있었다.
새 주택 형태의 명칭이 계속 나오는 즈음이라 저건 또 무슨 새로운 주거 공간인가 했다. 호기심이 생겨 다시 본 그 옆에 있는 ‘투룸’을 본 후에야, 아하! 원룸을 음역(音譯)한 것이라고 직감을 했다.
두문법칙에 따라 ‘월’로 발음되는 ‘원룸’이 월농넘이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길에서 실없이 웃을 수도 없어 집에 와서 한참 웃었다.
조그만 업소 공간에 7,80세나 됨직한 노년들이 화투짝에 몰입하고 있었으므로 옛날 복덕방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중개 본업보다는 소일이 먼저임이 분명했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원룸 표기 하나 제대로 못 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옛날 한학을 한 분들이 쓰는 특유의 붓글씨체가 한참 내 눈을 놔주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조선조 초 두문동 사건의 ‘두문동 실기(1752)’의 필적과 유사했다. 그 ‘…실기’ 필체, 그리 잘 쓴 필적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정성은 들여 쓴, 고색이 창연(?)한 글씨체였다.
흔히 붓글씨체를 말할 때 잠두마제(蠶頭馬蹄·말발굽 누에머리)나 와룡장자(臥龍壯字·엎드린 용과 같이 힘 있는 글씨)를 일컫는다. 거기 쓰인 글씨체가 두 경우와는 거리가 좀 멀었지만 그 중개업소가 내 건 월농넘과는 거의 흡사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 후 그 월농넘을 다시 보려 가봤지만 그런 삽상(颯爽)하고 정감(?)이 어린 글자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우리 한글, 그런 재미있는(?) 음역을 볼 때마다 그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지구상에 멸실됐거나 통용하는 현존 언어가 70여 개라는데 그 중에 창제 원리와 창제자의 성명(신원)이 명확한 언어는 우리 한글뿐임을 세계인이 공인하는데, 그런 ‘월농넘’ 같은 음역도 할 수 있다니 자부하게도 한다.
그 노년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 발상으로 또 어디 가서 그런 치기(稚氣)에 가까운 음역 글자를 애교(?)스럽게 써 놓고 소일하고 있지는 않을까? 범람하는 외래어 속에 그렇게라도 음역해 표기하는 그 노년들이 어쩌면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