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평생을 살면서 가슴 아픈 사랑 한번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한쪽만이 좋아하는 반쪽이 사랑을. 일명 짝사랑이라 해야 할지, 요즘 유행하는 짝퉁사랑(?)이라 해야 할지……
원조의 사랑 이야기는 코흘리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웃마을 최 씨 집안의 조그마한 단발머리 소녀였다. 같은 반 맨 앞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 소녀는 말 한번 건네 보지 않았지만 우리 반 남학생들에겐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그 마을에 사는 옆 짝이 그 여학생을 너무 좋아해 귀찮게 치근대는 것을 나는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좋아하게 되었다.
다소곳한 여성스러움, 예쁜 얼굴, 아담한 키, 가냘픈 몸매, 낭랑한 목소리, 수줍은 미소, 무엇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천사 같은 소녀였다.
당시는 학교 운동장에 잡초가 많이 나서 호미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 풀을 뽑기 위해 담임선생님이 작업 지시를 내리기 전에 내가 좋아하던 그 소녀가 호미를 가지고 놀다 그만 손가락을 쪼고 말았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다쳤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마음이 아려 왔지만 위로의 말도 한마디 못하고 혼자 가슴만 졸였다. 그 아련한 옛 추억이 회갑을 지낸 이 나이에도 아슴아슴해 온다.
사춘기 시절,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는 중학교에 가서도 그 소녀를 마음속으로만 사랑하며,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 당시 중학교는 면소재지에 있어 왕복 8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통학하던 시대였다. 버스 통학이라도 했으면 버스 안에서 그녀를 가까이 볼 수 있겠지만, 이른 새벽밥을 먹고 걸어서 저녁 늦게 하교를 하니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당시엔 남학생이 많아서 A반은 남학생만 편성했고, B반은 남녀 공학 반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난 3년 동안 A반에만 편성되어, 그 여학생과는 대화 한마디 못 해보는 기구한 운명의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 반장 친구는 3년 계속 B반에만 편성되어 여자 복은 타고난 듯 나는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세월은 흘러 중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그녀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이웃 마을 친구들의 귀동냥에 의하면 서울인지 대구인지 가끔 한 번씩 고향에 다녀갈 뿐이지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여 나의 사춘기는 유수와 같이 흘러가 버렸다.
누가 세월을 소리 없는 폭군이라 했던가. 그 이후로는 그녀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보고 싶을 때면 앨범을 꺼내 놓고 사진이 닳도록 만지기도 하고, 가슴에 품고 자던 날이 많았다. 다행히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와는 친정이 같은 곳이라서 장날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면 안부도 묻고, 친정 동네 소식도 듣는 것이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어렴풋이 대구의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집 옆방에서 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 일학년 때 다짜고짜로 찾아갔다. 막상 만나고 보니, 가슴에 있는 말 한마디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그녀 역시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그 이후로 용기를 내어 몇 번 더 찾아 갔으나 한결같이 냉랭하게 대하였고, 귀찮게 구는 나에게 치명적인 쪽지 글을 손에 쥐어 주었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그 글을 읽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난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 앞으로 찾아오지 말아줘’
원래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했으며,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릴 때부터 조그마한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만 들어도 며칠 동안 밤잠을 못 자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상대를 좋아해도 말 한마디 못하는 암사내 마냥 생뚱맞기는 다반사였고, 여학생들이 있는 곳에 가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못했다.
한쪽이 좋아하는 반쪽이 사랑을 짝사랑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반짝사랑’이라고 이름 붙여야 맞지 않을까.
그 이후로는 그녀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바람에 날려 보내고 사춘기의 좋은 기억들만 가슴속에 고이고이 묻어둔 체 강산이 세 번 바뀌도록 만남의 인연은 닿지 않았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던가.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녀를 친구들의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좀 어색하긴 했지만 자연스런 만남으로 위장했으나, 사춘기 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고이 간직하기엔 너무나 아쉬움을 남긴 채…….
강산이 수없이 바뀐 지금은 사춘기 시절의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어색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지금도 그 친구의 모임이 있는 자리라면 단숨에 달려가고 싶은 심정은 무엇 때문일까.
문득 ‘주현미’의 ‘짝사랑’이란 유행가 가사가 생각난다.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아! 사랑인가 봐…….’
세월이 약이란 말이 있다. 그렇게 벙어리 냉가슴 앓듯, 오매불망(寤寐不忘) 혼자서만 끙끙대던 암사내도 세월 앞엔 장사가 없는가 보다. 여학생 앞에만 가면 말 한마디 못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던 나였지만, 그 짧지 아니한 세월이 사람을 몰라보게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뻔치가 좋아졌다고나 할까. 지금은 웬만한 여성들이 모인자리에서도 당당하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우스갯소리도 할 수 있는 유연한 성격으로 탈바꿈하였다.
십수 년 전 현직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녀와의 꿈같은 만남은 두 번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 모임에서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수차례 통화 끝에 팔공산 갓바위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갓바위를 오르면서 옛날이야기로 화제가 시작되었고, 살아온 인생 역정도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었으며, 많은 대화도 오고갔었다. 쪽지 글을 받고 충격 받은 이야기며, 그녀 또한 어떤 대학생과 교제 중이라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그렇게 해서 첫 만남은 성공적이었고, 언제 시간 나면 포항에 한 번 놀러 오라는 약속까지도 받을 수가 있었다.
이듬해 포항에서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해변을 걸어도 보고, 차 안에서 음악감상도 했다.
점심때가 되어 바닷가 횟집에서 맛있는 전복죽까지 얻어먹고, 솔숲이 우거진 해변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자판커피 한잔까지 나누면서, 가슴에 못다 한 옛이야기로 실타래 풀 듯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 순간은 참으로 행복했고, 세월을 수십 년 다시 되돌려 놓은 기분이었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고즈넉한 해변 솔숲 벤치에서 꿈같은 시간은 시나브로 흘러갔고, 서산에 지는 해가 두 사람의 환상적인 만남을 갈라놓았다.
그 누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고 했던가. 그 당시 손목이라도 한번 잡아 보았더라면 원이라도 없었을 것을,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 이후로는 서로가 일에 바쁜 나머지 종종 안부만 들을 뿐 만남은 없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현실로 수년간 흘러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도 이따금씩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어린 시절 혼자 가슴앓이 하던 상념에 젖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곤 한다.
마치 ‘메밀꽃 필 무렵’의 휘영청 달밤에 물레방앗간에서 성서방내 숫처녀와 단 한 번의 꿈같은 사랑을 나누던 허 생원의 이야기처럼…….
사랑과 그리움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민병도’님의 ‘불이(不二)의 노래’란 시조가 문득 떠오른다.

그리움은  그리워서 가슴에 묻고
아름다움은 아름다워서 영혼에 묻고
거룩한 나의 그대는 그대 안에 두었네.

첫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레는 가슴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겠지만, 누구를 두고 오랫동안 말 못하는 짝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인생의 참 사랑을 알리라.
평생 동안 가슴 아픈 사랑을 한 번쯤 겪어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심한 짝사랑의 가슴앓이를 했다. 지금은 그 순정을 혼자 만의 아름다운 옛 추억으로 고이 가슴속에 담아두고 싶다.